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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무원파이어족 Jun 23. 2023

조기퇴직 가능케한건 8할이 부동산이다

평생을 가난했던 내가 공직에서 조기은퇴할수 있었던건 부동산투자다.


 20여 년 전 결혼 초기 전 재산 2천만원으로13평 남짓한 공무원임대아파트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4년 살았고, 만기가 되어 나오게 되었을때도 가진재산은 역시 2천만원뿐이었다. 그때까지 자녀도 없었지만 워낙 박봉이다 보니 도무지 재산은 늘지 않았다. 이 돈으로 월세든 전세든 다음 살 집을 구해야 했다.


 집을 구하는 첫번째 기준은 무조건 대출금이 적게 나가는 것이었다. 당시 대출이자가 5-6프로나 되는 고금리였다.  공무원이었음에도 신용대출이자가 10프로 넘었던 적도 있을 정도였다. 가뜩이나 생활비도 부족한 판에 주거비용에 드는 비용을 최소화해야했다.


 처음부터 집을 산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다, 적당한 가격의 전세나 월세가 목표였다. 그러던중 우연히 지역 중고나라 카페에 5천3백만원 빌라를 급매로 판다는 게시글이 눈에 들어왔다. 


 마침 내 수중에 딱 2천만원이 있었는데, 이 돈을 중도금으로 걸고, 나머지 잔금은 기존 대출을 승계하는 조건이었다. 내 상황에 딱 맞는 조건이었다. 여러번 고민끝에 예정에 없이 이 달동네 고바위 빌라를 사게 되었다. 생애 최초로 부동산 등기계약을 한 것이다.


 당시 집 보러 다닐때 입지좋고, 양지바른 곳에 자리한 경비원 딸린 한동짜리 큰 빌라가 눈에 들어왔다. 와이프와 서로 반해서 어떻게 하면 이런 곳에 살수 있을까 너무나 부러워서 맘속으로 입만만 다셨던 기억이다. 15년 전의 그 빌라는 내 맘속에서 마치 꿈의 궁전처럼 자리잡아 아직도 한번씩 추억삼아 찾아 거닌다.  


 내가 산 빌라는 싼 만큼 매우 고지대 산만디에 위치했다. 빌라에서 시내를 바라보면 아파트가 수없이 빽빽하게 많이 보이는데, 정녕 나는 왜 저들 틈에 끼어 살지못할까? 이게 흙수저의 한계인가? 혹은 내가 뭘 잘못 판단하고 살고 있나 하는 회한이 든 적도 참 많았다.


 그 즈음 한창 바쁜 회사생활로 8시 출근해 10시 퇴근하는 삶이 반복되다 보니 희망이나 꿈을 그려볼 여유가 전혀 없었다. 생활 또한 궁핍하여서 당시 카시트나 유모차 같은 유아용품도 다 중고로 쓰거나 지인에게 얻어다 썼다. 애기들 분유도 와이프는 일동후디스 같은 비싼 분유를 원했고, 나는 싼 분유를 살수 밖에 없다며 부부싸움도 많이 했다. 애들 나들이 시킬때마다 고바위를 오가며 매일 땀 흘려가며 어렵게 살았다.


이런 어려운 생활 가운데 언젠가는 내 명의로 된 아파트 한번 가져 볼 기회가 인생에 한번은 오지않을까 막연한 희망만 있었지, 미래에 대해 생각해볼 여유와 계획이 없는 삶이었다.






 어쨌든 내가 산 이 부산의 달동네 고바위 빌라에서 자식 두명을 낳고 4년 정도 살고 있을 즈음 부동산 대세 상승기가 왔음을 모두들 얘기하고 있었다. 누구집은 10프로 올랐니, 누구집은 20프로 올랐니 하는 얘기가 들렸다. 내 상식으로 집을 샀는데 거주하면서 20프로 이득까지 취한다는게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철저히 부동산에 문외한이었다.


 그냥 단순한 호기심에서 부동산 불러서 살고 있는 빌라 견적을 내봤다. 근대 놀랍게도 3,4천만원 오른 가격을 제시받았다. 놀래서 무조건 올랐을 때 서둘러 팔아야 된다는 생각이 들어, 예정에도 없이 3천 5백만원 정도의 차익을 얻고 빌라를 팔았다. 이때가 비로소 내가 가진 자산의 두배가 훨씬 넘는 시세차익으로 자산 상승의 시발점이었다.


노동소득이 전부인줄 알고, 이번 생애 절대 목돈을 모으기란 불가능하다고 느낄때쯤 우연히 찾아온 최초의 자본소득이었다.


 빌라팔고 전세를 구할때도 사실 직장동료나 지인들이 대출을 받아서 실거주로 집을 사거나 부동산에 투자하라고 조언했다. 그렇지만 여전히 대출받는데 부정적이었고, 부동산이 비정상적으로 급등했기에 더 이상 오른다는 불가능에 가깝다며, 매매할 생각은 없었다.


 투자 개념 자체가 없었고, 일해서 돈을 모으는게 불안함이 없다는 고정관념이 강했다. 오히려 다니던 회사도 몸이 더 힘들지만 더 많은 월급이 나오는 주야 교대근무로 바꿔 지원하고, 허리띠 바짝 졸라매어 2년간 3천만원을 악착같이 모았다. 


이렇게 해서 드디어 투자의 최소 시드머니라고 하는 1억 자산에 근접하게 되었다. 이때가 결혼하고 10년 후인 내 나이 서른 아홉살 때쯤으로 지금으로부터 8년 전쯤 되는 시기였다.





 전세 2년 만기 후 전세를 연장 할지, 대출 받아서 집을 살지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을때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만한 계기가 우연히 찾아왔다. 그건 바로 부동산 투자카페의 댓글 하나였다. 지역 부동산 카페에 당시 나의 상황에 대한 고민 글을 올렸다.


 어느 분이 댓글로 그 돈이면 모지역 재개발에 투자하고 남은 돈으로 빌라 월세 가라는 답변을 주었다. 무엇에 꽂혔는지 이 분의 답글이 마치 메시아라도 되는냥 내 맘속으로 깊이 파고들었다. 그렇게도 부동산 투자에 부정적이던 내게 말이다.


추천한 재개발 물건은 당시 카페에서 가성비로 꽤나 논란이 있던 인지도 있는 재개발 구역이었다. 이런  인기 아파트에 내가 동참한다 생각하니 갑자기 없던 욕심이 꾸역꾸역 올라왔다. 재개발은 커녕 아파트 매수 경험조차 없던 내가 다음날부터 막무가내로 부동산 임장이라며 수십군대의 부동산을 나홀로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기초지식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때로는 면박을 당해가며 끈질기게 묻고 공부해 나갔다. 이러기를 한달째,드디어 프리미엄 5천에 총 투자규모 8천만원 정도의 재개발 물건을 덜컥 구매했다. 


 여기에 한술 더 떠서 또 한번의 간큰 행동을 연이어 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투자후 남은 이삼천만원 돈으로 아파트 월세를 가려고 했었다. 25평에 2천에 70만원 월세아파트가 맘에 들어서 월세를 10만원만 아니, 5만원만이라도 할인해 주십사 읍소했지만, 단 1만원도 깍아 줄수 없다며 철벽을 쳤다. 


 그때 눈치빠른 부동산 소장님이 33평 급매가 있는데 안사도 되니 일단 한번 보자며 꼬드겨서 봤는데 넓고 깨끗한게 평생 우리가족이 원했던 바로 그런 아파트의 모습이었다. 급하게 머리를 굴려보니 월세 내는거 보다 대출내서 이자갚는게 더 이득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부동산 소장님이 던진 미끼를 덥썩 물고 말았다.


무엇에 홀리듯 신용대출과 담보대출까지 영끌해서 내가 살던 지역 최고 대장아파트를 풀 레버지리로 자산을 거의 투입하지 않고, 2억 후반에 덜컥 구매하게 된 것이었다.


 투자카페의 댓글 하나가 벼락구매로 이어지면서 부동산 투자에 나도 모르게 입문하는 계기가 된것이다. 투자 문외한에서 어느 순간 공격적인 투자를 가능하게 했던게, 역대급 저금리 덕분이었다. 


 당시 2억 8천 아파트 구매에 주택담보대출 2억을 받았는데, 2.46% 이율로 월 이자비용이 40만원 밖에 되지 않았다. 이를 계기로 부동산 투자에 본격 관심을 두고 실제 분양권, 구축 재개발 아파트, 갭투자, 월세투자 포함 7-8건의 투자를 진행했다. 이런 과정 중에 깊은 부동산 침체기가 와서 어려운 적도 있었고, 깜짝 상승기도 두루두루 겪었지만, 결국엔 저금리에 레버리지를 적극 활용하는 투자로 한때 텐인텐을 달성하는 성과를 올렸다.





 어렸을 때부터 가난하게 살다가 대학교 3학년 때 우연히 친구따라 공무원이 되었다. 덕분에 가난했던 우리 집안에 어느 정도의 경제적 안정은 물론 심적인 여유도 생기면서 직업적 만족도는 매우 컸다.


공무원이 박봉이라 월급을 모아서 경제적인 부를 이룬 건 아니다. 대신 안정적 생활기반과 대출에 유리한 장점을 활용해 경제적 성과를 이루는데 밑 바탕이 되었기에 항상 감사히 생각한다.


 그렇게 평생을 가난했던 내가 40대에 공직에서 명예퇴직으로 파이어족이 될수 있었던건 역시 아파트투자의 작은 성공이 절대적이었다.


이제는 이런 무리한 투자활동은 내 인생에 다시 없을 것이다. 


내게 공무원 조기 은퇴를 가능하게 했던건 8할이 부동산 투자였음은 명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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