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할 때 도서관에 종종 다닌다. 특별한 목적이 있지 않더라도 말이다. 논문을 찾거나 책을 빌려야 할 상황이 아니라도 산책 후에 잠시 들려서 신문이나 간행물을 읽으며 시간을 보낸다. 그래서인지 도서관은 직장을 그만둔 후 평일 낮에 어디서 시간을 보낼까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머릿속에 떠오르는 곳이다.
대학생 때 공강(空講)이 생길 경우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이 대학교 도서관이었다. 도서관은 나같이 평범한 학생이 시간을 보내기에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도서관에 있으면 돈을 쓸 필요가 없고 열람실에 편하게 앉아서 책을 볼 수 있었다. 정기간행물실과 자료실에 있는 수많은 책들을 보고 있으면 마치 내가 부자가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도서관은 공부하기 좋은 곳일 뿐만 아니라 피곤할 때 쉬기에도 좋은 곳이었다. 점심을 먹고 오후가 되어서 도서관 열람실에 앉아 책을 보면 몸이 나른해져 나도 몰래 잠이 스르르 들곤 했다.
도서관에 있으면 자주 마주치는 학우들이 있었다. 마치 도서관 동지랄까. 그들과 별다른 대화 없이 가벼운 눈인사만 하더라도 왠지 친밀감이 형성되는 느낌이 들었다. 그중에는 우리 학과 학우들도 있었다.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학우들로부터 중간고사나 기말고사를 준비할 때 종종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또한 도서관에 다니면서 고등학생 때와 다르다는 점을 느꼈다. 고등학생 때까지는 선생님들이 공부하라고 지겹도록 말했는데 대학생 학우들은 그런 말을 듣지 않아도 알아서 묵묵히 미래를 위해 공부하고 있었다.
중간고사나 기말고사가 가까워오면 평상시와 다르게 도서관은 시험을 준비하며 공부하는 학우들로 넘쳐났다. 중간고사와 기말고사의 비중이 성적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었다. 도서관 열람실에는 칸막이가 있는 책상들과 칸막이가 없는 넓은 책상들이 있었다. 학우들은 공강 때 빈자리에 앉아서 공부를 했다.
도서관 열람실에서 공부하는 학우들 중에 메뚜기족이 있었다.메뚜기족은 공부하고자 빈자리를 찾다가 못 찾아서 다른 학우 자리에 잠깐 동안 앉아서 공부하는 학우들을 일컬었다. 그들은 시험이 가까워져서 열람실이 만실일 때 다른 학우 자리에 앉곤 했다. 메뚜기족은 누구나 될 수 있었다. 자리가 없어서 주인이 있는 학우 자리를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공부하는 행동은 누구나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그들 개개인을 '메뚜기'라고 불렀다. 메뚜기는 자리 주인이 오면 비워주고 또 다른 빈자리를 찾아 옮겨 다니는 불편함을 감수했다. 특히 시험기간에 도서관 열람실에 일찍 와서 자리를 잡지 못하면 메뚜기가 되기 일쑤였다. 자기 자리가 아닌 남의 자리에 앉았기 때문에 그들의 소지품은 분실이나 도난의 위험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 물건을 잘 챙겨야 했다.
1, 2학년 때 서울에서 통학버스로 경기도에 있는 H대학교 분교에 다녔다. 거리가 멀다 보니 도서관 열람실 자리를 잡기가 어려웠고 메뚜기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주인이 오면 자리를 비워줘야 하는 메뚜기 신분이지만 굳이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학우들로부터 시험족보라던가 정보를 얻기가 훨씬 수월하기 때문이었다. 공부 잘하는 학우들이 도서관에서 공부를 많이 했기 때문에 도움을 받으려면 어쩔 수 없었다.
메뚜기족이 싫어하는 학우들이 있었다. 그들은 도서관족이었다. 그들은 책상 위에 책들을 세워놓거나 펴놓고 의자에 죽치고 앉아서 장기간 책을 보는 학우들이었다. 그들은 열람실 내의 자리를 사석화 했다. 수업을 듣거나 볼일이 생겨서 자리를 비울 때는 책상이나 의자 위에 옷, 필기구 등 여러 소지품들을 놔두고 다녔다. 마치 자리를 비워두는 동안 메뚜기족이 앉지 못하게 영역표시를 하는 것처럼 말이다.
도서관족은 짧게는 수일에서 길게는 한 달 이상 자리를 옮기지 않고 공부를 했다. 도서관에 가끔씩 오는 학우들은 대체로 그들을 도서관 모범생으로 보았다. 하지만 메뚜기족은 그들을 얌체족으로 보곤 했다. 메뚜기족은 도서관족이 장기간 한 자리에 앉아서 공부하려면 정당하게 자리값을 내던가 아니면 합당한 봉사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군대 갔다 오기 전까지 메뚜기 생활을 했던 나는 3학년 복학생이 되었을 때 도서관족이 될 기회를 잡았다. 우리 학과 선배는 나에게 도서관 자율위원을 해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그가 자율위원장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자율위원을 하게 되면 열람실 내의 지정석 한자리와 사물함 한 곳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자율위원은 열람실 내 면학 분위기 조성을 위해 학우들이 열람실 규정을 준수하고 있는지를 확인했다. 도서관 폐관 시에는 열람실의 퇴실 안내와 좌석 정리 등의 일을 했다. 도서관족 생활이 메뚜기족 생활보다 훨씬 편했다. 마음대로 가방과 책들을 자리에 놓고 다녀도 자율위원 지정석이라는 표시에 아무도 내 자리에 앉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학생 때 도서관을 이용하는 학우들의 모습은 다양했다. 도서관의 분위기는 차분하여 재미가 없을 것 같지만 알고 보면 흥미로운 점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