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살 여행을 함께했던 승훈이가 생각났다
정든 피렌체를 떠나는 날이다. 10시반의 이른 기차를 타야한다. 보통 같았으면 일찍일어나 피렌체의 아침 풍경을 한번 둘러봤을 테지만 와인과 함께한 저녁의 여파로 조금 늦게 일어났다. 서둘러 씻고 짐을 챙겼다. 옆 침대에 누워 늑장을 피우던 독일 친구에게 가벼운 인사를 남기고 길을 나섰다. 떠나는 날의 날씨는 언제나 맑다. 맑은날과 좋은 풍경은 또 언제나 나의 발걸음을 느리게 만든다. 하지만 서둘러 산타 마리아 노벨라역으로 향했다.
시간에 맞춰 열차에 몸을 실었다. 기차를 타고가면 로마까지도 2시간 남짓 짧은 시간이면 도착한다. 이제는 기차를 타고 이동하는 것이 그리 어색하지 않다. 익숙하게 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펴고 글을 쓴다. 기차여행을 몇번 하다보니 이제 2시간 정도는 금방으로 느껴진다. 로마에 도착했다. 참 이상한 기분이지만 이제는 뭔가 새로운 도시에 도착했다는 설렘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 이 죽일 놈의 매너리즘. 만약 로마가 나의 첫 여행지였다면 이 역사적인 도시에 도착했다는 흥분감에 엄청나게 설렜을 텐데 말이다. 이런 생각을 하며 강제 설렘을 장착하고 역밖으로 나갔다. 능숙하게 구글 지도를 켜서 나의 숙소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로마에서부터는 좀 더 치안이 좋지 않아 각별히 주의를 해야한다는 데 별 차이점은 느끼지 못하겠다. 기차역에서 15분정도 떨어진 곳에 숙소를 구한 탓에 조금 힘이 든다는 생각뿐이다.
오후 한시쯤 숙소에 도착했다. 하지만 체크인 시간은 두시였기에 잠시 옆 휴게실에서 대기를 해야했다. 마침 회사에서 추석전에 해결해야할 몇가지 중요한 회사일이 있었다. 그래서 도착하자마자 노트북을 열어 급한 업무 처리를 했다. 일에 멀어진지 고작 열흘도 되지 않았는데 기계적으로 들어가던 회사 인트라넷 접속 아이디가 순간 생각이 나지 않았다. 기분이 묘했다. 하지만 역시 손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게 금새 일을 처리하다보니 직원이 나를 찾았고 체크인을 할 수 있었다. 방에 들어가니 사람이 있었다. 근데 잠시 머뭇거리게 되었다. 팬티만 입고 있는 중년의 유럽 남성이 반갑게 손을 흔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내 정체모를 냄새가 내 코끝을 찔렀다. 유럽의 게스트 하우스를 다니다 보면 가끔 이런 장기 투숙자를 만날때가 있는데 오늘이 그 날인가 보다 싶었다.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적응하게 될 것이다. 바로 정신을 차리고 반갑게 인사를 했다. 방안에는 그 남자 이외에도 다른 터키여자가 있었다. 그 여자와 무언의 공감의 눈빛을 나누고는 가볍게 인사했다. 방안에 대충을 짐을 던져두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로마에서는 내일 하루 바티칸과 시내투어를 신청해놓았기 때문에 그 전후로 따로 계획을 잡아두진 않았다. 그래도 오늘하루를 무의미하게 보낼 순 없으니 네이버 카페에서 동행을 찾아보았다. 뭘 할지 모르겠을땐 동행의 계획에 기대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기 떄문이다. 마침 로마 저녁 야경 동행을 구하는 사람이 있어서 연락을 했다. 총 4명이 만나 함께 동행을 하기로 했다. 여자분 두분은 저녁을 먹고 넘어오겠다고 해서 나는 먼저 남자분을 만나러 시내의 맥주집으로 향했다. 로마는 왠지 와본적이 있는 것도 아닌데 휘적휘적 동네처럼 걸어다니게 된다. 이탈리아에 조금은 익숙해진듯 하다.
숙소에서 조금 걸어가니 남자분이 있다는 맥주집에 도착했다. 맥주집 안으로 고개를 돌리니 조금 앳되 보이는 한국인 남자가 보인다. 가볍게 인사하니 나를 단번에 알아보고는 인사한다. 서로의 여행자 레이더에 포착된 새로운 여행자를 맞이하며 밝게 인사했다. 조금 어려 보인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어릴 줄은 몰랐다. 24살의 강원씨다. 나와 무려 9살이나 차이가 난다. 문득 나와 같이 놀아줘서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원씨는 직업 군인으로 일하고 있다고 한다. 군산 비행장에서 공군으로 일하면서 비행기 정비를 담당하고 있다. 곧 보직에 좀 변경이 생길 예정이고 그렇게 되면 당직 근무가 생기게 되어 그전에 급히 휴가를 냈다. 군인이라 그런지 자유로운 여행지에서 만났음에도 뭔지 모를 바름과 강직함이 느껴진다. 강원씨와 좀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 여자분 두분도 이내 바에 도착했다. 27살 윤경, 29살 예은이었다. 대학교 친구 둘이 함께 떠나온 유럽 여행이라고 한다. 혼자 오는 유럽도 물론 좋지만 막역한 친구와 함께 오는 여행은 또 너무나 좋다는 걸 잘알기에 그들의 여행이 부러웠다.
나도 처음으로 유럽 여행을 간것은 딱 10년전 나의 친한 친구 승훈이와 함께였다. 22살 겨울 우리는 꼼장어를 먹다가
“우리도 유럽한번 가야되는거 아니야?”
라는 이야기를 하며 충동적으로 결정했고 23살 1월 동유럽 여행을 함께 했다. 지금보다 많은 것이 부족했던 나이였기에 많은 어리숙한 일들이 있었고 그 속에서 많은 재미가 있었다. 1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 날의 일들이 생생하다. 아직도 둘이 술을 먹으면 함께 여행한 이야기 만큼 재밌는 것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이 둘의 여행에서 생기는 모든 일들이 이들의 평생의 추억이 될 것임을 안다. 그래서 너무 부럽다. 부러움과 추억에 문득 승훈이에게 연락을 했다. “너랑 함께 왔으면 정말 좋았겠다.” 승훈이는 최근 새로이 술집 오픈을 준비중이라 함께 올 수 없었다. 인생에 몇번 없을 이런 추억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정말 소중한 일이다.
다들 성격이 밝은 탓에 우리는 금새 친해질 수 있었다. 요즘 MBTI로 말하면 다들 E였다. 외향적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바에서 맥주 한잔씩을 더 마신 후 바를 빠져나와 로마의 야경을 보러 나섰다. 콜로세움부터 포로 로마노, 판테온, 트레비 분수까지 주요 관광지들의 야경을 보기로 했다. 로마를 상징하는 역사 유적들을 본다는 것에 설레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마주한 것은 콜로세움이다. 역사 건축물을 본다고 큰 감동이 있을까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웅장한 외관에 압도당할 수 밖에 없었다. 이미 어두운 저녁이었지만 아름다운 야경을 위해 곳곳에 설치된 주황색 조명으로 밤에도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우리는 콜로세움의 굴곡진 옆면이 잘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고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강원이를 따라 다음 코스로 이동했다. 강원이는 이미 몇일전에 로마에 도착해서 다 돌아본 곳이라 가이드처럼 안내가 가능했다. 또 본곳인데 괜찮은지 물었고 강원이는 지금 한국말을 할 수 있다면 다 좋다며 자신이 안내하겠다고 했다. 짧은 기간 혼자였지만 꽤나 한국인이 그리웠나보다. 강원이를 따라 양쪽으로 포로 로마노가 펼쳐진 길에 도착했다. 널찍한 길 양쪽으로 옛로마의 잔해가 보였고 그 길위에는 버스킹을 하는 예술가들이 있었다. 현대적인 음악과 고대 로마의 조합이라니 꽤나 신선했지만 분위기가 잘어울렸다.
그곳을 지나 20여분을 더 걸으니 말로만 듣던 트레비 분수를 만날 수 있었다. 원래 트레비 분수의 야경은 조명이 좋은 편이 아니라 그리 예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명품 브랜드 ‘펜디’의 후원으로 트레비 분수 주변의 모든 조명을 바꿀 수 있었고 그 이후로 저녁에도 이렇게 화사한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는 판테온이다. 판테온앞에서 우리는 서로 사진을 찍어줬다. 사람 하나가 포즈를 잡으면 세사람이 붙어 사진을 찍어주었다. 마치 시사회장의 연예인이 된듯 부끄러워 하면서도 적극적으로 포즈를 취했다. 혼자 여행을 하다보니 내 사진을 많이 남길 기회가 많지 않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찍어줄 때 열심히 찍었다.
그렇게 저녁 시간이 빨리 흘렀고 우리는 모두 로마 중앙역 근처에 숙소를 잡았기 때문에 함께 걸어서 돌아 올 수 있었다. 셋은 늦은 밤인데도 젤라또를 또 먹으러 간다고 했다. 나는 내일 오전 일찍 바티칸 투어에 참여해야했기 때문에 돌아오는 길 중간에 먼저 작별 인사를 건네야 했다. 잠시만나 깊은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여행지에서 만난 모든 인연들과의 작별은 아쉬운 법이다.
오늘의 인연은 아쉬움과 함께 남겨두고 내일 바티칸 투어를 위해 일찍 잠들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