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 복원 불가능한 내 모습 받아들이기
사람은 누구나 인생의 어느 순간에 이르면 제거도 수정도 불가능한 한 점의 얼룩을 살아내야만 한다. 부주의하게 놓아둔 바람에 의해 팽창과 수축을 거쳐 변형된 가죽처럼, 복원 불가능한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여야 한다.
- 구병모, 한 스푼의 시간
이러다 심정지
평화롭던 심장내과 외래 진료날, 6년 넘게 나의 인공심장박동기를 점검해 주시고 있는 당근 선생님은 (첫 만남 때 당근 볼펜을 가지고 계셨는데, 그게 인상적이었다.)
그날따라 표정이 안 좋으셨다. 당근쌤, 왜 그러시죠?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아.. 뭐가 잘못됐구나..‘ 갑자기 담당 주치의랑 상의하고 올 테니 기다리라고 하셨다.
진료실에 들어갔더니 주치의는 “이번 주 내로 수술해야 할 거 같아요.”라는 말을 꺼냈다. 엄마도 나도 어리둥절. 6년 사이에 몸이 성장하면서 심장이랑 박동기랑 연결되어 있던 리드선이 아슬아슬하게 이어져있는데, 이게 끊어지면 갑자기 심정지가 올 수도 있으니까 바로 일정을 잡자고 했다.
초등학교 5학년은 자신에게 심정지가 올 수 있다는 말을 들으면, 우선 뇌정지가 먼저 온다. 당황+황당+얼빠짐+멍해짐.
그 뒤로 처음 내뱉은 말이 “선생님, 저 겨울방학 숙제를 다 못해서 입원 못해요.”였다. 나름 고르고 고른 변명이 고작 방학숙제라니.
통할 리가 있나, 이틀 뒤 바로 입원.
왜 제가 아직 수술대죠?
이번에 한 건 수술이 아니라 시술에 가깝다. 전신마취가 아니라 수면마취로 진행됐고, 수술실이 아니라 심장중재시술실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쇄골 근처에 피부를 약간 절개해서 2시간이면 끝나는 비교적 간단한 시술.
12살에 받은 인공심장박동기 시술은 현재 성인들에게 하는 방법과 동일하다. 당일엔 이동식 침대 위에 누워서 눈을 꼭 감았다. 시술실 안으로 들어가니까 낯선 사람들로 가득했다. 간호사 선생님께서 가장 많이 하셨던 말이 “긴장 안 해도 돼요”였다. 기계음이 삑삑 울렸고 심박수는 130에 가까웠다. 심박수로 긴장한 걸 들키다니.. 조금 민망한 걸.
눈부시게 밝은 조명과 차가운 공기, 모니터에 보이는 심장 사진. 양손을 묶는 의료진들, 수술모, 잠깐 자고 일어나면 된다는 말. 체감상 10분은 맨 정신으로 있었다.
‘저 빨리 재워주시면 안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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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떴다. 눈앞은 비닐과 파란 천으로 둘러져 있었고, 가위가 서걱서걱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의 말소리도 희미하게 들렸다. 처음엔 그저 ‘이게 뭐지?’라는 생각뿐이었다. 3초쯤 지났을까, 인지가 됐다.
...뭐야. 나 아직 수술대 위에 있는 거야?
시술 도중에 깬 건 꿈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알고 보니 나는 수면마취가 잘 안 되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렇게 정신을 제대로 못 차리고 엑스레이를 찍었고, 꽤나 무거운 모래주머니가 올려진 상태로 의식을 되찾았다.
모두에게 끝은 있다. 시간대가 다를 뿐.
입원 당시에 처음으로 코드블루(code blue) 방송을 들어봤다. 코드블루. 심정지 환자가 발생했다는 뜻이다. 그때 내 옆으로 의료진들이 전력질주를 하는 모습을 봤는데, 너무 인상적이라서 잊히지가 않는다.
병원에서 크고 작은 아픔을 마주하면서 '죽음'에 대한 생각을 꽤 일찍 했다. 한 건물에 산부인과와 장례식장이 있는 인생의 압축판인 병원에서 나는 늘 슬펐다.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온기를 나눴던 사람은 심장이 멈추면, 점차 싸늘한 시체로 변한다는 사실과 더 이상 사랑하는 사람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이건 그 당시에 쓴 노트다. 퇴원 이후에 가장 먼저 한 건 방학숙제가 아니라, 심장에 대한 공부였다. 심장박동기가 몸에 두 개나 생긴 초등학생은 짜증이 났다.
심장 뭔데. 니가 뭔데ㅔ. 왜 또 병원 가야 하는 건데? 왜 나는 남들과는 다른 삶을 사는 건데? 이게 멈추면 왜 사람이 죽는 건데?
받아들이는 데까지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진 않았다. 어쩔 수 없는.. 자연의 현상 같은 것. 병의 원인은 모르지만 일단 받아들이는 것. 동행하며 살아가는 것,
이런 삶도 괜찮다고 여겨주는 것.
책가방을 못 매는 아이
시술 이후에 나는 한동안 책가방을 맬 수가 없었다. 쇄골 쪽에 박동기가 있기 때문에, 어깨끈이 닿으면 통증이 있었다. 부모님은 작은 캐리어를 끌고 가라고 했는데.. 어떻게 그래요. 너무 시선집중이잖아요.
다행히 나는 캐리어를 끌고 다니지 않았다. 두 달 넘게 책가방을 들어준 친구가 있었다. (가방 셔틀 아닙니다ㅜㅜ)
부끄럽지만.. 첫사랑이다. 글 쓰는 것도 민망할 정도로 유치한데, 그는 피아노 학원 구석에서 네모스낵과 콜라볼을 주면서 고백을 했고, 나는 새침한 표정으로 알겠다고 답했다. 그렇게 5개월 정도 만났다.
그 친구는 나와 다르게 체력이 너무 좋았다. 취미가 파쿠르 기술을 배우는 거였고, 나도 영향을 받아서 이후로 외발 자전거를 탈 줄 알게 됐다.
방과후가 끝날 때까지 항상 기다려주고 가방을 들어줬던 기억이 난다. 덕분에 수술 부위가 많이 아프지 않았고 참 따뜻했다. 이사를 가면서 서서히 연락이 끊겼지만, 지금 돌이켜봐도 좋은 친구였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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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곁엔 변함없이 나를 사랑해 주는 친구들이 있었다. 백 마디의 말보다, 한번 곁에 있는 게 더욱 소중하다는 걸 아는 친구들.
씩씩하게 살아갈 수 있었던 이유는, 심장박동기와 동행하며 지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마음의 온도가 따뜻한 사람들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 또한 좋은 사람이 되려고 애쓴다. 모두에게 통하진 않지만, 적어도 나를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이 순간을 떠올렸을 때 ‘아, 괜찮은 애였지.’ 정도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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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스프링 노트에 적혀있는 기록을 함께해 준 모든 인연에게 감사를 전한다. 그리고 그 노트의 뒷면에 적어놓은 말이 있다.
내가 무미건조한 오트밀 같은 하루에
레몬 식초 2큰술 더해주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나는 당신의 하루가 너무 퍽퍽하지만은 않고, 상큼한 구석도 조금은 스며들길 바란다. 적당한 산미처럼 매력적인 순간은 분명 찾아올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