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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닥치고써 Jul 14. 2024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170일 차.

하루 종일 날씨가 좋지 않습니다. 가만히 있어도 사람을 환장하게 할 만큼 눅눅합니다. 한참 전부터 등골을 따라 흘러내렸던 이미 말라 버렸고, 다시 또 한 줄기의 땀이 흐르고 있습니다. 잠시 바람이라도 쐬려 밖으로 나가려면 우산을 펼쳐 들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막 쏟아붓는 것도 아닙니다. 아마도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할 때의 딱 그 가랑비 정도로 종일 내리고 있습니다. 그 흔했던 바람기 하나 없고, 창문을 열어 놓으려니 은근히 비가 들이칠 것 같고, 실내에 마냥 에어컨을 틀어놓으려니 꿉꿉함과 서늘함이 동시에 느껴져 최악의 기분을 느끼게 됩니다.


이 날씨에 아내는 아침부터 어디로 간 걸까요? 사람들은 저에게 그렇게 말하곤 합니다. 그렇게 걱정이 되면 전화를 걸어보든지 카카오톡 메시지라도 하면 되지 않느냐고 말입니다. 글쎄요, 제가 무심한 남자라서 그런 것일까요, 굳이 그렇게까지 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아마 이렇게 말한다면 이해가 될까요? 눈에 보이면 있어서 안심이 되고, 어딘가로 가고 없으면 어딜 가서 뭘 하며 시간을 보내는지 궁금한 것, 딱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해야 할까요?


대체로 이럴 때에는 서로에게 연락을 하지 않습니다. 그게 어쩌면 허울 좋게 서로에 대한 배려 혹은 프라이버시를 침해하지 않으려는 행동으로 비칠지 모르겠으나, 엄밀하게 말하자면 그건 서로에 대한 무관심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도 명색이 배우자, 즉 제 아내인 사람에게 어찌 그리 무심하게 굴 수 있느냐고 할 수도 있을 듯합니다. 23년 동안이나 한 이불 덮고 산 사람에게 그러면 안 된다고 말하는 친구를 본 적도 있습니다. 그러면 저는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우리가 한 이불을 덮으며 살을 맞대고 살아온 건 결혼 초기 8년 정도뿐이었다고 말입니다. 그 나머지인 족히 15년 이상은 각방에서 서로가 다른 이불을 덮으며 살아왔으니 살을 맞댈 기회 또한 없었다고 말입니다.


아마도 그래서겠지요. 어디에서 뭘 하는지, 밥때가 되면 식사는 했는지 걱정은 됩니다만, 그 걱정을 밖으로 표출하진 않습니다. 그건 어쩌면 아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제 아내 역시 제가 밖에 나와 있으면 일절 연락을 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연락을 해야 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말입니다.


무엇이든 익숙하다는 것은 좋은 것일 수도 있고, 그만큼 무서운 것일 수도 있습니다. 15년 넘게 굳어온 이 행동패턴이 이미 우리에겐 익숙함이라는 대단히 위험한 것을 주고 말았습니다. 관계의 회복이라든지 혹은 누군가의 말을 듣고 더 나은 관계의 변화를 꾀하기 위한 그 어떠한 노력도 우리에겐 부질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옷이라도 내 몸에 맞아야 그걸 입는 의미가 있는 것일 테니까요.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살고 있는 지금이 그리 나쁘진 않는 것 같습니다. 네, 저도 압니다. 아마 지금의 이 생활이 지속된다면, 많은 사람들이 그러고 있듯, 저 또한 정년퇴직할 때쯤 되면 졸혼이라는 수순을 밟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미 서로를 남자와 여자로 보지 않는 이상, 오랜 세월 그저 남편이나 아내의 역할 혹은 아이들의 아빠 혹은 엄마로서의 역할만 기대하고 살아온 만큼 그 끝은 정해져 있는 것이겠습니다.


자, 그렇다면 저의 노년은 두 가지를 준비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경제적인 독립과 독신으로 살기 위한 준비가 둘 다 되어야 한다는 것이겠습니다. 어디서부터 단추를 잘못 꿰었는지 따위의 배부른 생각은 하지 않으려 합니다. 새 술은 새 술에 담아야 하듯, 물을 엎질렀을 때에는 사용하고 있던 컵에 그 물을 다시 쓸어 담기보다는 오히려 새 물을 담는 게 더 합리적이지 않겠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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