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작이 Nov 22. 2024

다정도 병인 양하여 잠 못 들어하노라.

2024.11.22.

오늘의 문장
기분을 회복하려면 혼자만의 시간이나 나 아닌 다른 존재의 다정함을 접착제 삼아 마음에 고르게 펴 바른 다음, 시간이라는 바람 속에서 천천히 말려야 한다. 기분이 부서지거나 조각나는 건 한순간이다. 하지만 원래상태로 복원하기 위해선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 이기주, 『보편의 단어』




나의 문장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제

일지춘심을 자규야 알랴마는

다정도 병인 양하여 잠 못 들어하노라.


오늘의 문장을 보고 떠오른 한 편의 시조입니다. 참고로 이 시조는 고려 시대에 지어진 시조들 중에서 가장 문학성이 뛰어난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는 이조년 시인의 다정가입니다. 종장의 첫 구인 '다정도'에서의 다정을 취해 그렇게 이름이 지어진 것입니다.


몇 학년 때인지는 기억나지 않습니다만,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렸던 시조입니다. 그때 저의 첫 느낌도 마음이 심란했었던지 처음 이 시조를 배우던 수업 시간에 바로 외우게 되었습니다. 그러고도 무려 35년이 넘는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 여전히 제 머릿속에 남아 있는 걸 보면 이 시조가 조금은 각별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오늘 문장의 핵심 단어가 '다정'인 같으니 잠시 시조를 뜯어보고 지나갈까 합니다.


배꽃에 달이 환하게 비치는 어느 밤에 읊은 시조가 되겠습니다. 밤이면 으레 어두운 일반적이겠으나 꽃도 하얗고 위에 떨어지는 달빛도 밝으니 사위가 온통 하얗게 느껴지는 그런 밤인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이런 풍광을 보고 있노라면 멀쩡한 사람도 마음이 설렐 수도 있을 듯한 그런 밤입니다. 쉽게 잠을 이룰 없을 그런 밤이기도 할 것입니다.


문득 시인은 하늘의 은하수를 보고 있습니다. 그러다 느낍니다. 아주 깊은 밤(23시~01시)이구나, 하고 말입니다. 지금처럼 시계가 있던 시대가 아니었으니 뭔가를 보고 언제쯤인지를 짐작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매개체가 은하수인 모양입니다. 하늘에 있는 은하수의 위치를 보니 삼경쯤 되었으려니 짐작하고 있는 것이겠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이런 눈빛으로 사물을 바라본다면 마음과 눈빛 속에 어찌 살가운 마음이 담기지 않을까요?


문득 시인의 귀에 익숙한 두견새의 울음소리가 들려옵니다. 너무도 구슬프게 들리는 울음소리, 그러나 그 두견새가 가지에 서린 봄의 마음을 어찌 알겠느냐고 단정합니다. 솔직히 저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은 없지만, 두견새의 울음소리는 너무도 구슬퍼 예부터 한이나 슬픔을 표상하는 이미지로 각인되어 왔습니다. 아마도 여기에서의 일지춘심은 화자의 마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겠나 싶습니다. 단순히 봄을 기다리는 마음에서 벗어나 어쩌면 인간관계에서 비롯되는 모든 감정을 포함한 마음인지도 모릅니다. 결국 두견새의 울음소리만큼 시인의 마음도 슬프고 고독하다는 뜻이겠습니다.


그러나 정작 시인이 생각하는 그 누군가는 시인에 대한 생각은 추호도 없이 편히 잠들어 있을 깊은 밤입니다. 그 가운데에 시인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이렇게 마당에 나와 배꽃도 보고 달빛에도 취해 보고 흘러가는 은하수를 바라봅니다. 문득 들리는 두견새의 울음소리에 마음까지 심란해지는 그런 밤입니다. 정이 많아 잠을 못 이루는 밤이니 결과적으로 다정은 병이 되는 셈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시조를 다시 한번 읽어보고 뜻을 되새겨 보니 마음이 우울해집니다. 그러나 이 우울은 부정적인 이미지를 그려내지는 않습니다. 이렇게도 깊은 밤에 마음을 뒤집어 놓은 건 그놈의 '다정' 때문이니까요. 정(情)도 너무 깊으면 충분히 병이 있다고 시인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저
자신을 생각하지 않는 누군가(그 상대가 연인이든, 부모든, 형제든, 친구든, 임금이든, 혹은 나라든)그리며 밤잠을 설치는 아련한 마음을 가진 그 시인이 부러울 뿐입니다. 인간에 대한 깊은 정이 바탕이 되어 있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니까요. 조건 없이 누구에게든 다정할 있는 그런 눈빛과 마음으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빈틈이 있어서 저는 숨을 쉽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