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가운데 부산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환한 빛과 함께 성희의 손끝이 떨리면서, 사방에서 먼지를 일으키며 뭔가가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직 눈에 보이진 않았지만, 귀로 듣고 또 가슴으로도 들을 수 있을 만큼 점점 그 소리와 움직임이 커졌다.
어떤 것들은 날아오고 또 어떤 것들은 달려온다. 사방에 늘어선 그들을 보며 성희는 자신이 그들을 불러낸 것이라 생각했다. 성희는 혼자서 뭔가를 열심히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이미 사라져 버리고 없을 법한 고대의 오래된 언어로 얘기하는 듯한 자신의 모습이 너무도 놀라웠다.
조금씩 입을 열어 말을 할 때마다 주변의 그 적막함과 공허함이 물러나고 서서히 눈에 잡힐 듯, 그리고 손에 잡힐 듯 모든 풍광이 익숙한 광경들로 변해가고 있었다.
성희의 말을 알아들은 듯 어딘가에서 몰려온 네 마리의 짐승들이 각자의 자리에 섰다. 몇몇은 두 발로 땅을 지탱한 채 다른 두 발로 힘껏 땅을 박차고 있었고, 다른 몇몇은 큰 날개를 펼쳐 거센 바람을 일으키고 있었다.
청룡과 주작이 현란한 날갯짓을 했다. 백호와 현무는 땅에 대고 힘찬 발길질을 했다. 그 까마득했던 절벽도, 요란한 물소리를 내던 폭포도 순식간에 사라지고 성희를 가운데에 두고 사방에서 서로 다른 세상이 펼쳐지고 있었다. 이미 어둠은 저 멀리 물러났고, 눈부신 태양 아래 새로운 삶이 움트고 있었다. 마치 창문을 가린 하얀 커튼을 걷어내자마자 일제히 쏟아지는 햇살처럼 그렇게 하늘이 말끔히 걷히고 있었다. 천지를 창조하며 심히 보기 좋았더라, 하는 말이 문득 떠오를 만큼 성희가 보기에도 그 광경은 그저 아름답다는 말 외엔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었다. 그런 것이 생명의 경이로움인가 싶었다.
몸통에서 뻗어나가면서 차츰 가늘게 길어지는 꼬리를 흔들며 하늘로 날아오르는 청룡, 그 푸르른 빛깔만큼이나 온 천지가 푸르게 깨어나고 있었다. 그의 몸짓에 따라 황량한 벌판이 어느새 새싹으로 뒤덮이고 벌써 그 새싹은 지면을 뚫고 올라와 천지의 조화를 이루었다. 한껏 날개를 퍼덕이며 동쪽으로, 동쪽으로 날아가 버린 청룡…….
기러기의 가슴과 수사슴의 몸통, 제비의 얼굴과 수탉의 부리를 한 주작은 그 모습이 영락없는 봉황이다. 뱀의 목과 새의 이마, 용의 무늬와 원앙의 깃털, 그리고 물고기의 꼬리를 한 채 그는 두 날개를 활짝 펼치고 하늘로 날아오르려 한다. 그는 여름을 몰고 왔다. 이미 대지는 봄의 기운을 떨쳐 내고, 주작의 전신에서 발산되는 뜨겁게 불타는 빛만큼이나 대지가 활활 타오르려 한다. 이미 그의 모습도 저 먼 남쪽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다.
눈부시도록 새하얀 호랑이의 머리에 용의 몸통을 한 백호는 서쪽을 향해 두 발을 힘껏 굴리고 있다. 우렁찬 포효와 함께 그가 있던 영역은 어느새 가을로 접어들었다. 조금 있으면 아마도 그는 죽음의 사신에게 이 싱그러운 대지의 축복들을 넘겨주어야 할 것이다. 서쪽으로, 서쪽으로 질주하는 백호…….
모두가 떠나고 이젠 다리가 긴 거북의 모습에다 몸에 뱀을 칭칭 감고 있는 현무만 남았다. 북쪽에 굳건히 선 그는 온몸이 비늘과 두꺼운 껍질로 덮여 있다. 그는 이제 마지막 남은 계절인 겨울을 불러왔다. 만물이 땅속으로 기어들고 그 생명력의 마지막까지 처절히 얼어붙게 했다. 그는 죽음을 상징했다. 그 어떤 색도 뒤덮어 버리고 마는 검은색, 곧 죽음의 의미로서 말이다.
모두가 성희에게 인사라도 하려는 듯 고개를 돌렸다가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성희를 둘러싸고 있던 사계절의 기운이 다트판을 돌린 것처럼 쉬지 않고 회전하기 시작했다. 수십 수백 번의 회전 속에 점점 그 속도가 느려지다 어느 순간 조금 전의 그 눈에 익은 모습들이 차례차례로 반복되며 일어났다.
어느새 밤이 깊어 오고 있었다. 낮 동안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던 사찰 경내가 모처럼 만에 고요함을 되찾았다. 멀리 보이는 영축산이 마치 사찰을 감싸 안고 있기라도 한 듯 그렇게 고즈넉하게 들어앉은 형국이었다.
지나가던 한 비구가 법당 안을 들여다보고는 말을 건네며 지나갔다.
“주지 스님, 밤이 깊었습니다. 주무시지 않으시고요?”
“잠이 쉬이 오지 않아 그러는 것이니 괘념치 마시게.”
주지는 목탁을 바닥에 내려놓고 섬돌 위에 가지런히 놓인 신발을 신었다. 벌써부터 차가운 기운이 섬돌 위에 내려앉아 있었다. 뜰에 내려선 주지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눈부시도록 밝은 달빛이 사찰 경내를 내리비추고 있었다. 늦가을로 접어들면서부터 아침저녁으로 쌀쌀해진 탓인지 무심한 입김만 허공에 흩어질 뿐이었다. 내리 걸친 가사 자락을 바닥에 끌다시피 하며 경내를 거닐어 보던 주지는 잠시 고개만 돌리면 어느새 겨울이 올 것 같단 생각을 했다.
소리를 내지 않고 조용히 지나가던 비구들이 잠시 걸음을 멈추고 합장을 올렸다. 그럴 때마다 주지도 손을 가슴 앞에 그러모으고 같이 합장을 했다.
모두가 잠이 들 시간인데도 담 너머에서 새어 나오는 강렬한 불빛이 눈을 자극했다. 뭘 하는지 저 시자는 아직도 불을 켜 놓고 자세를 흩트리지 않고 있었다. 여럿 있는 동자승 가운데 특별히 총애를 둔 그 아이는 주지가 시자로 부리는 아이였다. 그래서 주지는 그 아이를 볼 때마다 자신이 불가에 귀의하기 전의 어린 시절이 떠올라 새삼스러워지곤 했다.
얼마 만이던가? 그간에 깡그리 잊고 살았던 속가에서의 일들이 하나둘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제 이 나이가 된 마당에 추억이니 뭐니 하는 것도 우습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모처럼 만에 아련한 기억에 젖어보는 것도 그리 나쁘진 않았다.
주지의 생전 부모들에겐 자식이 없었다. 그런 그들이었으니 백일기도를 감행하게 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곳에 와 백일치성을 드리고 천팔십 배 기도가 끝나던 즈음 그들은 부처님 전에 맹세를 했다.
“부처님, 저희에게도 자식을 하나 허락해 주십시오. 그렇게만 된다면 기꺼이 그 아이를 부처님 전에 바치겠습니다!”
거짓말처럼 백일기도가 끝난 뒤 배가 불러왔다는 그의 모친은 열 달이 지나고 아이를 낳았다. 그것도 건강한 사내아이를……. 딸이라면 모를까, 아들을 점지해 준 부처의 법력에, 생전의 양친은 아무런 조건을 달지 않고 여덟 살이 되던 해 아이의 손목을 잡고 와서 절에 맡기고는 가 버렸다. 바로 그 아이가 지금 이렇게 잠 못 이루고 찬바람을 맞으며 서 있는 주지 자신이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주지는 부모의 허락 하에 만 7세가 넘어야 출가 생활을 시작할 수 있고, 건강한 육체와 건전한 정신을 지닌 사람이어야 비구가 될 수 있다는 그런 전통적인 조건에 모두 부합되는 셈이었다. 자그마치 오십 년은 훌쩍 넘은 옛날 중의 옛날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