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비나스와 나의 자리

by 얼렁뚱땅 도덕쌤

대학원 석사과정 수업에서 발표용으로 제출한 글인데 마음에 들어서 올립니다. 저에게 주어진 주제는 레비나스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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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글을 시작하기 전에


지난 수업에서 니체를 배웠다. 니체가 한 대부분의 말에 동의하지 않지만, 예술적인 글이 사람에게 울림을 준다는 그의 생각에는 동의한다. 나도 몇 년 전부터 세상을 바꾸는 종이는 논문이 아니라 광고지라는 주장을 해왔는데, 그 이유는 논리와 타당성이 아니라 감정적 자극이 사람의 행동을 바꾼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주체적 사고를 강조하는 글을 예술적으로 작성했던 니체의 행동은 그 자체로 모순적이라고 생각하고, 그 지점에서 니체를 구구절절 비판하고 싶은 욕구가 들끓지만, 이 글의 주제는 니체가 아니라 레비나스이기 때문에 여기서 멈추기로 한다.


니체를 본받아서 딱 이번 한 번만, 대학원 과제물로 수필을 제출해보려고 한다. 학문적 글쓰기가 지켜야 하는 양식을 모두 무시하고, 그리고 교수님께 혼날 각오를 하고. 니체는 나에게 “수필이 아니라 시를 써야지”라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시를 어려워하고 예술적인 수필에는 자신이 있으므로 수필을 선택한다. ‘레포트 형식을 어긴다니, 이래도 되나?’ 하는 불안에 손이 떨리지만 그럼에도 떨리는 손으로 계속 키보드를 두드리는 이유는, 니체가 말한 예술적 글쓰기의 필요성에 공감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이 글을 통해 내가 소개하려고 하는 사람이 레비나스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레비나스는 내 삶에 아주 큰 영향을 끼친 철학자여서, 레비나스에 대해 쓰려고 하면 나에 대해 쓰고 싶은 욕망을 멈출 수가 없다. 니체가 준 구실을 핑계 삼아, 이번에는 멈추지 않기로 한다.


1. 들어가며


아낌없이 편애하는 제자가 몇 있다. 그 중 하나는 자사고에 기간제 교사로 근무할 때 가르친 학생 최인데, 최의 매력 중 하나는 뭐든지 혼자 감당하려고 애쓴다는 점이었다. 최는 어려운 일이 있어도 혼자 해결하려고 했고, 비난받을 일이 있어도 혼자 책임지려고 했다. 그런 최가 기특하면서도 안쓰러워서 나는 최를 설득하곤 했다. 너는 아직 어린애다. 타인의 도움은 어릴 때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도움 요청’은 기간 한정 쿠폰이니까 제발 좀 사용해라. 최는 내 간곡한 부탁을 듣는 시늉조차 하지 않았고, 쿠폰은 미사용 상태로 유효기간이 끝났다. 내가 친구 조에게 하소연했을 때 조는 말했다. “어른스럽게 뭐든지 혼자 해내겠다는, 그런 생각 자체가 어린애 같은 거지.” 독립적이고 강인한 인간상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어린아이”라고 이름 붙였던 니체는 이 일화에 대해 뭐라고 말할까? 분명한 점 하나는, 최가 도움을 받지 않으려 애쓸수록 나는 최를 돕기 위해 애쓰게 되었다는 점이다. 최를 돕다가 '와 이거 교장한테 걸리면 해고다'라고 생각했던 적도 여러 번 있었다.


니체는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에 쫄딱 젖을 걸 알면서도 기꺼이 산책을 나서는 사람을 칭찬했다. 맑을 때 해도 되고 그냥 안 해도 그만인 그놈의 산책을, 별 이익도 목적도 없이 굳이, 고통이 예상되는데도 선택한다는 점을 니체는 좋아하는 것 같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그런 산책을 하고 있는 사람을 보면 이유를 궁금해할 것이다. 이유 따윈 없어! 니체는 그렇게 말하겠지만 나는 이미 이유를 알고 있다. 이유는 딱 하나다. 그들은 모두 강아지를 키우고 있고, 강아지는 태풍이 와도 산책을 원한다. 감히 단언컨대 그 이외의 이유는, 적어도 현실에는 없다.


“그래! 인생이여 다시 한번.” 니체는 말했고 나는 제자 신의 추천으로 본 영화 “어바웃 타임”을 떠올렸다. 주인공은 시간여행을 할 수 있고 후회되는 과거를 모조리 되돌려 후회없는 인생으로 교체하며 살았는데, 영화 중반부쯤 그런 그의 인생이 전환점을 맞는다. 동생의 문제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어린 딸이 태어나기 전으로 다녀왔더니, 딸이 아들로 바뀌어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과거를 변화시키면서 자신의 다른 정자가 아내의 난자와 만나버렸던 것으로 보인다. 아들도 어차피 자기 자식인데, 실리를 따지자면 초능력을 포기할 정도의 사건은 아닌 것 같은데, 주인공은 딸을 유지하기 위해 시간여행의 상당 부분을 포기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관객이 그 결정에 공감하는 것으로 보인다. 내 경우를 돌아보면, 나는 어떤 괴롭고 나쁜 사건 때문에 울산에서 일하게 되었고, 아마 그 사건이 없었다면 서울에서 교사 생활을 했을 것이다. 그랬으면 내가 좋아하는 연예인도 마음껏 보러 갈 수 있고, 친구들도 훨씬 자주 만날 수 있었다. 만약 누가 나에게 시간을 되돌려 그 사건을 없애준다고 하면, 나는 그렇게 할까? 그런 제안을 받을 일도 없으면서 굳이 긴긴 고민 끝에 그 제안을 거절하기로 결정한 지 몇 년 되었다. 서울에서 교사 생활을 했어도 편애하는 학생이 생겼겠지만, 그 애들도 똑같이 내 사랑하는 제자겠지만, 그중에 최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 인생이여 다시 한번.” 내가 내 인생을 기꺼이 끌어안는다면 그건 다 최와 신과 림 등등 내가 만난 학생들 때문이다.


니체는 괴롭더라도 강해지고 싶어 한다. 하지만 사람이 괴로움을 감수하면서까지 강해지기로 선택한다면, 그 강함이 실리는 없더라도 아름답다면, 그것은 나 아닌 다른 존재 때문이지 않나? 내가 오직 나를 위해 강해지는 것이 무슨 가치가 있나? 그리고 현실적으로, 오직 나를 위해 강해지는 데 성공한 사람이 세상에 있나? 나는 최를 내버려 둬도 되는데 굳이 돕고자 해고를 무릅썼고, 강아지 주인들은 산책 하루 안 한다고 큰일 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태풍을 뚫고, “어바웃 타임” 주인공은 기존의 자식과 새 자식 중 전자를 선택하기 위해 시간여행을 포기한다. 사람을 강하게 만드는 것, 이익 없는 고통을 선택하게 만들고 운명을 사랑하게 만드는 것은 다른 생명이며 그 선택에 아름다움을 부여하는 것도 다른 생명이다. 그리고 그러한 관계성을 가장 잘 설명하는 철학자가 레비나스라고 나는 생각한다.


2. 현현하고 명령하는 얼굴


20살, 대학에 입학해서 알게 된 선배 중에 정이 있다. 정은 생판 모르는 남의 죽음을 수집하는 사람이었다. 정의 페이스북 타임라인에는 타인의 죽음이 가득했다. 굳이 찾아보지 않았다면 몰랐을 죽음, 모르고 지내더라도 아무 상관 없을 죽음을 정은 일일이 찾아보고 매번 슬퍼했다. 며칠 밤낮을 슬퍼하면서 단골 술집에서 안주도 안 시키고 담배를 뻑뻑 피웠다. 영정사진으로 처음 본 얼굴의 죽음을 누구보다 생생하게 느끼는 반면, 자기가 간암이나 폐암으로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은 못 하는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은 고작 스물두 살이었다. 어렸고 어리석었던 정은, 마찬가지로 어렸고 어리석었던 나의 첫사랑이 되었다. 그 후에 알게 된 사실. 정은 사회주의자였다. 엥?


정은 스스로를 운동권이라고 칭하지 않았다. 속도와 방향에 차이가 있을 뿐 모든 삶은 운동적이기 때문에 누구는 운동을 하고 누구는 운동을 안 한다는 식의 분류는 잘못되었다고 정은 말했다. 하지만 다른 사회주의자 선배 경은 이렇게 말했다. “당신 운동권이야? 라고 물었을 때 정처럼 구구절절 대답이 길어지면 운동권이야. 아니요 세 글자로 대답이 끝나야 운동권이 아니지.” 정을 짝사랑했던 나는 정이 가는 곳을 따라다니지 않을 방법이 없었고 “당신 운동권이야?”라는 질문에 구구절절 대답이 길어지는 사람이 되었다. 그렇다고 내가 뭐 대단한 걸 했던 것은 아니고, 유기물로 된 피켓받침대 역할 정도?


사회주의자가 아닌 후배 수가 물었다. “누나는 왜 운동을 해요?” 나는 말하기 전에 생각하는 타입이 아니고 항상 말하고 나서 생각하는 타입이라, 그날도 생각하기 전에 대답이 튀어나왔다. “나는 겁이 많거든.” 수는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겁이 많으면 임용고사 공부나 해야지, 무슨 데모를 해요. 수의 얼굴에 그렇게 쓰여 있었다. “내가 도망치면 남은 사람들이 어떻게 될지, 그게 너무 무서워.” 사람들은 자꾸 해고되고 자꾸 가난해지고 자꾸 죽었다. 피래미 피켓받침대 하나가 더해지든 덜해지든 세상은 달라지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서울역으로부터, 시청광장으로부터, 책임감으로부터 도망칠 수가 없었다.


그런 나날을 보내던 중 강의실에서 레비나스를 만났다. 처음 들어보는 이름의 철학자가 나보다 더 내 마음을 잘 설명할 줄이야. 레비나스는 나보다 낮은 자가 나보다 높은 곳에서 나에게 명령한다는 표현을 썼다. 타인은 과부와 고아, 약자이며(성경에 나오는 표현을 레비나스가 그대로 사용한 것을 여기 인용했다. 2025년에 이런 표현을 쓰면 차별 발언일 듯) 나보다 가난하고 연약하고 상처받기 쉽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타인은 나의 주인이 된다. 타인의 얼굴, 특히 눈이 내게 다가오는 순간 나는 타인에게 사로잡히고, 나에게는 타인을 도울 책임이 생긴다. 레비나스는 시종일관 수동적인 표현을 사용한다. 내가 타인을 돕는 것은 나의 능동적인 선택이 아니고, 신의 부름에 응답하는 선지자의 태도에 가깝다. 심지어 타자의 얼굴과 마주하게 된 것도 그 얼굴이 나에게 현현했기 때문이지, 내가 그를 인식했기 때문이 아니다. 감각을 통해 상대를 파악하는 행위는 근본적으로 나를 중심으로 타자를 흡수하고 일치시키는 행위이기 때문에 윤리와 무관하다. 즉 얼굴이 스스로 나에게 현전해올 때 윤리적 관계가 시작된다. 물론 타인을 돕는 행위는 나의 의지에 의한 것이지만, 그것은 적극적인 선행이 아니라 주어진 책임을 다하는 일일 뿐이다. 오히려 타인을 돕지 않으면 그것이 불의를 저지르는 일이 된다.


정에게 장렬하게 차인 뒤에도 사회주의자를 그만두지 못했던 나의 마음이 정확히 이런 것이었다. 나는 사회주의자가 되기로 다짐한 적이 없다. 그저 나에게 주어진 책임을 회피하지 못해서 계속 피켓받침대가 되었을 뿐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같은 수업을 듣고 있던 나의 동기들은 말했다. 저는 약자를 돕지 않아도 죄책감 안 느끼는데요? 저는 타인의 얼굴에 안 사로잡혀 있어요. 레비나스는 너무 이상적이에요. 레비나스와 나는 그 강의실에서 누구의 공감도 얻지 못했다. 그 경험으로 미루어볼 때, 이 글을 읽고 있을 사람들도 딱히 레비나스와 나에게 공감하지는 못할 것이라 짐작된다. 솔직히 2025년 대한민국에서 사회주의자에게 공감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나도 지금은 사회주의자가 아니다. 교사의 정치적 중립을 위해 전향했다.) 그러므로 레비나스의 설명과 약간 떨어져 있지만 같은 맥락에 있는, 읽는 사람이 더 공감할 만한 일화를 소개해보고자 한다.


나는 강아지는 키우지 않지만 고양이는 3마리나 키우고 있다. 고양이는 나와 무척 친밀한 관계이며 나는 세상 모든 고양이가 아니라 내가 키우는 3마리 고양이에게만 헌신적이라는 점에서 레비나스를 설명하기에 적절한 사례는 아닐지도 모르겠다. 레비나스는 친밀성을 전제로 한 애착으로 인해 타인을 돕는 일에 윤리적 가치를 부여하지 않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콜버그 3단계, 가까운 사람에 대한 애정에서 나온 이타적 행위는 레비나스의 관심사가 아니다. 레비나스가 타자를 말할 때 그 타자는 내 눈앞에 있는 특정인이 아니라 그저 ‘낯선 이’다. 나는 타자를 통해 세상 모든 사람, 지금 여기에 부재하는 제삼자와 만난다. 그래서 타자는 무한성이고, 보편성이다. 그렇기 때문에 레비나스의 이론에 맞추기 위하여 고양이와 나 사이에 친밀한 감정이 형성되기 전, 우리가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에 대해 얘기하고자 한다.


2021년, 첫 번째 고양이를 입양하기 위해 유기묘 보호소를 방문했을 때 나는 다른 고양이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런데 청천벽력. 보호소는 혼자 살면서 출퇴근을 하는 사람에게는 아기 고양이를 입양시킬 수 없다며 나를 거절했다. 아기 고양이는 많은 돌봄이 필요하고, 내가 출근하고 없는 동안 혼자 집에 있으면서 우울증에 걸릴 수도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망연자실한 상태로 발걸음을 떼지 못하는 내게 보호소 소장님은 성묘 입양을 권했다. 사람에 대한 독점욕이 강하고 다른 고양이를 너무 많이 질투해서 입양되지 못하고 있는 성묘가 있는데, 어차피 동생 고양이를 들일 계획이 없다면 이 고양이를 데려가는 게 어떠냐는 제안이었다. 그렇게 구름이는 우리 집으로 오게 되었다.


나는 그 제안을 받기 전에 구름이가 누구인지도 몰랐다. 절차를 밟고 1주일 후 구름이를 데리러 다시 보호소를 찾았을 때 수 많은 고양이 중 누가 구름이인지 구별하지도 못했다. 그렇게 구름이를 데려오는 차 안에서 나는 다짐했다. ‘최선을 다해서 행복하게 해줄게. 나보다 너를 우선할게.’ 그 마음은 친밀함에서 오는 애정이라기보다는 나보다 약한 존재에 대한 책임감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야근 후 지쳐 쓰러질 것 같아도 사냥놀이는 꼭 하고 자고, 나도 비싸서 못 사 먹는 농어나 옥돔 혹은 캥거루 고기를 구름이를 위해 구입하고, 출근할 때마다 구름이에게 말한다. “엄마 사냥하러 갔다 올게. 맛있는 거 많이 잡아 올게.”


2023년, 당시의 남자친구이자 현재의 남편이 고양이를 입양하고 싶다고 말했다. 유기묘 보호소에 한쪽 눈이 없는 고양이가 들어왔는데 너무 마음이 쓰인다며, 본인이 아니면 누가 이 아이를 입양하겠냐는 것이었다. 나는 구름이의 질투심을 이유로 입양을 반대했다. 우리는 결혼을 염두에 두고 사귀는 중이었는데, 우리가 같이 살게 되면 그 고양이를 구름이가 괴롭힐 확률이 높았다. 실제로 구름이는 보호소에 살 때도 성격이 장난 아니었고 인간을 독점하기 위해 다른 고양이에게 화를 내곤 했으니까. 나의 반대에도 구남친 현남편은 결국 한쪽 눈이 없는 부기(거북이), 그리고 부기와 가장 친한 루미(두루미)를 입양했다.


2025년, 우리는 결혼을 했고 구름이는 부기를 쫓아다니면서 때리는 중이다. 루미는 덩치가 커서 어찌하지 못하고 만만한 부기만 괴롭히는 것 같다. 인간들의 부단한 노력 끝에 때리는 횟수는 줄었지만 여전히 둘은 사이가 좋지 않고 구름이와 부기 모두 스트레스를 받으며 지내고 있다. 신혼 초에 5분마다 부기를 때리는 구름이를 보면서 남편은 “부기를 괜히 데려왔다”는 말을 가끔 했지만, 나는 한 번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당시 나에게는 당연히 부기보다 구름이가 더 소중한 존재였고, 구름이와 형성한 애착이 훨씬 깊었지만, 그럼에도 그런 말을 하지 않은 이유는 이미 데려온 생명에 대한 책임감 때문이다. 부기가 아니라 세상 어떤 고양이였다 해도 내 태도는 똑같았을 것이다.


뱃속의 아기도 지금의 내게는 입양한 지 얼마 안 된 고양이와 비슷하다. 보통 인간과 인간이 친밀해지기 위해서는 상대의 고유성을 알아야 하는데, 나는 내 아기에 대해 아는 게 없다. 성격도 말투도 습관도 가치관도 무엇도 알 수 없는 아기는 나에게 어떤 ‘특정인’이라고 보기 어렵다. 내가 아기에 대해 아는 것은 아주 약한 생명이라는 것, 그리고 내가 책임지지 않으면 이 아기는 죽는다는 것뿐이다. 나는 아기가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아기를 책임지기로 결심했다. 남편의 다른 정자가 내 난자와 만났어도 내 결심에는 변함이 없었을 것이다. 약자를 책임질 때 나는 내 눈앞의 1명이 아니라 무한을 책임지는 것과 같다는 레비나스의 설명이 이런 감각과 비슷하리라 생각한다. 레비나스는 출산성에 대해서 나와 전혀 다르게 설명했지만.


산책을 기다리는 강아지를 떠올려 보라. 기대에 찬 얼굴, 초롱초롱한 눈. 그 얼굴과 눈이 다가오면 인간은 책임을 느낀다. 산책을 하루 거른다고 해서 강아지가 병에 걸리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태풍 속을 산책한 인간이 병에 걸릴 확률이 더 높다는 것을 알면서도 결국 집을 나선다. 이익은 없고 손해만 예상되는 산책을 굳이 감행하는 이유는 다 그 얼굴 때문이다. 물론 레비나스는 유대 기독교 전통에 충실한 철학자이기 때문에, 그가 인간 외의 동물을 도덕적 고려의 대상으로 삼았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실제로 그의 책을 읽어보아도 비 인간 동물에 대한 언급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우리는 레비나스를 창조적으로 재해석하는 과정에서 ‘타자’의 범주에 강아지나 고양이를 포함시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설명하는 타자는 얼굴과 눈을 가진 약자라는 점에서, 이 정도의 확장은 전혀 억지스럽지 않다.


3. 책임에서 오는 주체성


난 어느 곳에도 없는 나의 자리를 찾으려
헤매었지만 갈 곳이 없고
우리들은 팔려가는 서로를 바라보며
서글픈 작별의 인사들을 나누네
-밴드 ‘브로콜리 너마저’의 노래 ‘졸업’ 中-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나는 나의 자리를 찾고 싶었다. 다른 사람이 아닌 나만이 할 수 있는 일, 내가 나라서 할 수 있는 일을. 유일한 존재가 되고 싶었고 이왕이면 가치 있는 방식으로 그렇게 되고 싶었다. 윤리 1타 인강 강사 이지영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체 불가능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유능한 인재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지만, 대체 불가능할 만큼 유능한 노동자가 자본주의 세상 어디에 존재한단 말인가. 적어도 이지영은 얼마든지 대체 가능한 강사로 보이고, 나도 교육부의 입장에서는 대체 가능한 교사 중 하나일 뿐이다.


여기가 나의 자리구나. 태어나 처음 그 느낌을 받았을 때 나는 스무 살짜리 피켓받침대가 되어 있었다. 물론 굳이 내가 아니어도 누구나 피켓받침대가 될 수 있다. 다른 사람에게도 약자를 도울 책임이 있으니, 내 피켓을 그에게 넘겨주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것은 나의 책임이다. “타인도 나에 대해 책임이 있지 않습니까?”라는 질문에 레비나스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마 그렇겠지만, 그것은 그의 일입니다.” 물론 이것은 나와 나에게 도움받는 타자 사이의 비대칭성에 대한 대화이고 내가 누군가를 도우면서 상호성을 바라서는 안 된다는 맥락에서 한 말이지만, 나 아닌 모든 누군가가 갖는 책임에 대한 이야기에도 적용해볼 수 있을 것 같다. 레비나스가 키티 제노비스 사건에 대해 언급한다면 같은 말을 하지 않을까? 물론 다른 사람에게도 신고할 책임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일입니다. 나는 지금 내가 짊어진 책임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그것을 수용하기만 하면 됩니다.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최와 나는 서로에게 대체 가능한 존재다. 나는 최를 만나지 않았더라도 내가 만난 학생들을 사랑했을 것이고, 최는 나를 만나지 않았더라도 알아서 잘 컸을 것이다. 실제로 최는 별로 나에게 고마워하지도 않았고, 내가 열심히 쏟아낸 잔소리를 새겨듣지도 않은 채로 알아서 잘 크는 중이다. 그럼에도 내가 다시 나쁜 일을 겪고, 다시 울산에 취직해서 다시 최를 가르치는 영원회귀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이유는 그 자리가 내 자리이기 때문이다. 최를 돕지 않는다면 내가 나로 사는 데에는 아무런 이유도 의미도 가치도 없다. 내가 최를 돕든 돕지 않든 최의 인생은 크게 바뀌지 않았고, 때문에 공리주의적으로 계산하면 나는 여전히 대체 가능한 존재다. 나는 도망칠 수 있었고 도망쳐도 됐다. 그렇지만 그 순간 최의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은 나였고 나는 도망칠 수 없는 책임을 느꼈다. 그 순간 그것은 나의 책임 나의 의무였고 누가 빼앗을 수 없는 나의 자리였다. 그것이 나를 대체 불가능한 유일한 존재로, 나로 만들었다.


책임과 주체성은 그렇게 연결된다. 나의 책임은 오로지 나의 것이며, 누구도 나를 대신할 수 없다. 책임은 나를 유일무이한 존재로 만든다. 이것이 나의 주체성을 설명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나로서의 내 자리가 이러한 타인의 본질적인 비참함에 응답할 수 있는 데서, 내게서 자원들을 발견하는 데서 성립”한다는 레비나스의 말을 곱씹고 있으면 고등학생 때의 내가 부끄러워진다. 유일해지고 싶었고 내 자리를 찾고 싶었던, 오로지 나 자신 말고는 아무 데도 관심 없었던 내가. 나만 생각하고 나밖에 모르면서 그 연장선에서 나의 주체성을 찾으려 했던 나는 얼마나 어리석었나. 타인을 환대하라는, 죽음보다 죽임을 두려워하라는 레비나스의 말은 자칫하면 나의 주체성을 포기하라는 주장으로 오해될 수 있다. 그러나 레비나스는 타인에게서 나의 주체성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타자와 나 사이에 관계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우리 두 사람이 다른 존재여야 한다. 다시 말해, 관계는 필연적으로 분리를 전제한다. 분리되어 있다는 것은 그와 마찬가지로 나에게도 자기성이 있다는 뜻이고, 우리는 동일한 인간이 아니라는 뜻이다.


4. 나가며


대학생이 된 제자 림을 만나기 위해 림의 대학 근처 번화가에 간 적이 있다. 림과 카페에서 수다를 떨다 보니 자정이 되어 각자 돌아가기로 했는데, 지하철 역 근처에서 어떤 취객이 우리를 쫓아왔다. 지금 돌아보면 단순 취객이었는데, 그때 우리는 이 사람이 마약을 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고 너무 무서웠다. 취객의 눈이 희번덕거렸고 어딘지 모르게 공격적이었기 때문이다. 림이 사는 기숙사는 꽤 외진 곳에 있었기 때문에 나는 일단 림을 기숙사 문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그리고 지하철을 타기 위해 다시 돌아오는데, 세상에, 깜깜한 골목길에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혹시 아까 그 취객이 지금 나타난다면? 지하철역이 그렇게 멀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별이 아스라이 멀듯이. 시간이 지나 친구에게 이 일화를 얘기하자 친구가 어이없어하며 말했다. “야. 너는 맞아도 안 죽냐?” 너무 맞는 말이어서 박장대소가 터졌는데, 언제나 생각보다 말이 빠른 내 입에서 이번에도 생각할 새 없이 말이 흘러나왔다. “림이 죽는 것보다는 내가 죽는 게 낫잖아.” 만약 내가 데려다주지 않아서 림이 죽으면, 내가 남은 생을 어떻게 살겠어. 죄책감 장난 아닐걸. 이렇게 대답하는 교사가 전국에 나 하나는 아닐 것이다.


당시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제자 신이 나에게 추천해준 책 "앞으로 올 사랑"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천문학자 케플러는 갈릴레오에게 이렇게 말했다. "갈릴레오! 얼마 후 모험을 떠나려는 여행자들을 위해서 우리가 천문학을 확립해둡시다. 당신이 목성을 맡는다면, 달은 내가 맡을게요!" 바빌로프와 동료들이 식량을 맡았다면 나는 무엇을 맡으면 좋을까? 나에게도 나만의 노력, 나만의 어제가 있다면 나만이 만들 수 있는 변화, 나만이 만들 수 있는 내일이 있을 것이다. 이 세상에 나만이 줄 수 있는 사랑이 있을 것이다. 나만이 낼 수 있는 용기가 있을 것이다. 나만이 질 수 있는 책임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내게도 단순하게 나아갈 길이 또렷이 보인다.


이 책을 브로콜리 너마저에게 소개하고 싶다. “나의 자리”는 여기에 있어요. 레비나스의 이야기는 언뜻 보면 너무 이상적이고 그저 이타적이고, 독자를 유혹하는 매력은 전혀 느껴지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저 수동적으로 책임을 다할 뿐, 내가 얻는 이익은 하나도 없는 이런 이야기에 마음이 일렁이는 사람은 적어도 2025년의 대한민국에는 많지 않다. 그래서 레비나스를 파는 광고지를 쓰고 싶었다. 여러분, 레비나스 한 입 해보세요! 레비나스도 현실을 꽤 잘 설명하고 있고, 내가 원하는 걸 얻을 방법도 가르쳐준답니다. 강아지의 얼굴은 좀 나를 사로잡는 듯도 하지 않나요? 주체가 되고 싶다면 레비나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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