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숙한 아이와 미숙한 어른, 그 중간에서
한국에서의 3년은 나의 인생 중 가장 아이 답지 못했던 시기였다. 분명 우는 법을 까먹었던 것이 틀림없다. 그때의 상처로 인해 수년을 걸쳐서도 쉽게 나아지지 않는 부분들이 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해외로 나가서도 나는 자유롭지 못했다. 오히려 더 큰 폭력과 맞닥뜨려야 했다. 고등학교 졸업까지 나는 길고 긴 인내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러나 나는 부모님의 무지를 원망하지 않는다. 나의 선택으로 비롯된 그때의 최선이 그뿐이었다는 걸 알고, 또 그로 인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무언가를 얻었다.
무엇이든 이겨 낼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
어둠 속에도 반짝반짝 빛나는 독립심,
그리고 사람의 내면을 바라볼 수 있는 깊이.
작지만 소중한, 나만의 조약돌 같은 깨달음이다.
나의 생존법은 어떤 고난을 맞이했을 때 그것을 나의 것으로 승화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과거를 바꿀 수 있다 해도 바꾸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어려운 일을 겪고 있는 이의 이야기를 들어주게 될 때, 그런 누군가에게 상담을 해주게 될 때, 나는 누누이 말한다. 생존법은 각각의 사람에게 다른 모양으로 나타나고, 그 상황을 어떻게 살아내는가는 각각의 장단점이 있다고. 이 상황을 지나가고 있는 나의 모습이 꼭 특정화될 필요는 없다고.
나는 홀로 견뎌내며 단단해지었을지언정, 도움을 쉽게 받지 못해 아직도 쉽게 부서지는 것처럼,
누군가는 연약하기 때문에 깊이 슬퍼하며 의지할 곳을 찾아, 자연히 새로운 싹을 틜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모두 최선을 다하는 것이고, 나도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살아냈다.그렇기에 나는 지켜지지 않은 것을 원망하지 않는다. 지난날에 넘어졌기에 오늘날에 내가 서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에게 있어 부모님으로부터 피치 못해 받은 상처는 나를 세상으로부터 지켜주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더 사소한, 지극히 평범한 일이었다.
언젠가 엄마는 엄마를 향한 나의 마음을 까맣게 잊으신 채, 도리어 나를 탓하신 일이 있었다. 5학년 남짓, 엄마의 생신이 곧 다가와, 당시에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을 고민했다. 문구점에서 스케치북과 색연필을 사들고 한 장 한 장 정성스레 꾸며 편지를 썼다. 작은 선물과 함께 잔뜩 기대에 부푼 마음으로 엄마께 드렸다. 미지근한 반응에 왠지 부끄러웠지만 그래도 고맙다 하시니 뿌듯했다.
그러고 얼마 뒤, 엄마가 분주하게 집에 들어오시더니 나에게 한마디를 툭 뱉으셨다.
“오는 길에 아는 지인이 나한테 너처럼 살뜰하게 챙겨주는 딸이 있어서 좋겠다더라.”
갑작스러운 칭찬에 어안이 벙벙하던 찰나,
“내가 그래서 넌 생기기만 그렇게 생겼지, 그렇지 않다고 했어. 네가 살뜰하긴 뭐가 살뜰하니? 날 챙겨도 네 동생이 챙기지. 내 생일날 아무것도 안 해줬잖아. 동생은 편지라도 써줬는데.
너무, 너무 억울했다.
엄마의 생일에 선물이라도 들고 온 건 우리 집에서 나 하나뿐이었는데. 스케치북을 꽉 채워 편지도 썼는데. 어버이날 용돈 털어 꽃 바구니를 사 온 것도 나였는데. 아빠도 기억 못 하는 결혼기념일을 챙기며 인형을 사 온 것도, 흰 종이를 오리고 접어 편지지를 만들어 아빠에게 편지라도 쓰라고 닦달한 것도 나였는데.
엄마를 향한 나의 마음이 전혀 헤아려지지 않았다는 생각에 충격을 받았다. 나는 변명조차 하지 못했다. 누구보다도 남 얘기 하는 걸 질색하시는 엄마가 얼마나 내가 원망스러웠으면 내 험담을 할까, 싶었다. 다음 해는 더 잘해야겠다, 다짐했건만, 그다음 해 생신에도 비슷한 일이 생겼었다.
내 인생 통틀어 엄마보다 내가 엄마를 더 사랑한 단 한순간이었을 것이다. 어린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아빠의 부재가 이런 식으로도 드러났다. 아빠의 부재로부터 오는 서운함이 나에게 옮아간 것이다.
엄마, 사실 난 그때 아직 너무 어렸어.
난 다 크지 못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