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이 왜 남으라 했어?
모든 폭력은 수면 아래에서 벌어졌다. 한국에서 보낸 나의 초등학교 생활은 겉보기에 평범했다. 어떤 상황에서든 약해지거나 질 수 없다는 고집과 폭력이란 형태를 충분히 인지하지 못한 탓에 나는 학교 생활을 나름 원만히 유지했기 때문이다. 돌아보면 무식했지만 용감했다. 그만큼 스스로에게 떳떳한 삶을 살아내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언젠가 선생님께서 반 앞에서 나에게 수업 후 남으라고 지시하셨다. 나는 별다른 생각 없이 수업 후 남았고, 전달 내용은 저소득층과 관련된 이야기였다. 아무렇지 않게 답을 하고 급식실로 향했다. 친구들은 왜 남아야 했는지 꼬치꼬치 캐물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당시 학생으로서 친구가 선생님에게 불려 간 이유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래서 아무렇지 않게 ‘저소득층이라 따로 전달 사항이 있었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친구들은 놀라며 큰소리로
“너 저소득층이야?“
하고는 되물었다. 나는 그것이 그렇게 놀랄 일인 줄 몰랐다. 하도 놀라기에 칭찬으로 받아들였다. 부모님이 돈을 잘 못 버냐는 말에도 나는 기분이 상하지 않았다. 어디서 나온 자신감인지 누구와 견주어도 스스로 꿀린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 사실이 나라는 존재를 더 돋보이게 만들어준다고 여겼다. 태어나기를 없이 자라는 환경에 최적화되어 태어났나 보다. 나는 어릴 때부터 결핍에서 오는 단단함이 참 마음에 들었다. 쉽게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고, 나를 더 발전시켰다.
친구들은 나의 반응에 금방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실제로 공개적으로 저소득층임을 선언(?) 했음에도 한 번도 그 사실이 문제가 된 적이 없었다.
사람들은 어떠한 사실 자체보다 그 일이 나에게 불러일으키는 감정을 더 중시하는 것 같다. 만약 내가 저소득층이라는 사실을 쉬쉬하고 부끄러워했다면 그것은 나의 약점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당당히 내 자리를 지키기를 선택했다. 놀림을 받더라도 나의 믿음대로 매일 식전 기도를 혼자 드리고, 도서관에서 꾸준히 책을 빌려 읽고, 돈이 없어도 솔직했다. 어느샌가 그들은 익숙해져 갔고, 간혹 동경하듯 나를 따라 하기도 했다.
내가 어쩔 수 없는 일들은 뒤로 하고 ,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해 나의 삶을 꾸렸다. 다행히 숨 쉴 구멍은 충분한 환경이었다. 덕분에 나의 한국 초등 생활은 마냥 힘들기보다는 추억할 것이 그 이상으로 많았다.
쾨쾨한 냄새가 배어있던 내가 좋아했던 오래된 도서관. 아침에 당번이 되어 짝꿍과 끙끙대며 들고 온 우유 상자. 1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과학 축제와 갈 때마다 설렜던 실험실. 학교 앞에서 팔던 노랗고 불쌍한 병아리들. 옆에서 팔던 달고나. 점심시간에 부리나케 학교 앞 슈퍼로 뛰어가 사 온 아이스크림. 학년끼리 갔던 뒷산 등산과 산 정상에서 먹던 엄마가 싸준 김밥. 만국기가 달린 운동회에서 좋아하던 남자아이와 열심히 했던 줄다리기 그리고 반장 엄마가 나눠준 햄버거. 수업시간에 친구들과 몰래 꺼내 먹던 간식. 준비물을 사러 꼭 들렸던 잡화점, 그리고 너무 비싸 구경만 했던 문구점. 학교 끝나고 재밌게 다니던 미술 학원,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오랜 친구. 학원 옆 분식집에서 팔던 500원짜리 피카추와 슬러시, 그리고 쏘떡소떡과 컵떡볶이. 길 건널목에 있던 문방구에서 팔던 온갖 불량식품. 산속에서 열린 교회 수련회. 하교 후 엄마와 동생과 즐겨 보던 예능. 월요일에 현장체험학습을 신청하고 가족들과 놀러 갔던 놀이동산. 엄마와 간간히 방문하던 찜질방과 탕 속의 노곤함. . .
시간이 지나고 나의 과거를 이야기할 용기가 생겼을 때, 부모님께서 당시 나의 상황을 깨달으시고 많이 후회하신 것을 안다. 나도, 내가 부모였다면 비슷한 마음이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나에게 너무나 중요한 밑거름이 되어준 시간이었고, 또 한국에 대한 이해도가 현저히 부족한 내가 그나마 한국인으로서 최소한의 경험을 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참 감사하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