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 메디오폰도를 완주한 재형은 헬멧을 벗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심장이 아직 가라앉지 않았지만, 그는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 나 해냈어. 나 완주했다고.”
그러나 전화기 너머는 조용했다. 신호음이 몇 번 울렸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다.
그는 잠시 멈칫하다가 다시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도 대답은 없었다.
“애들한테 말 좀 해줘. 아빠가 해냈다고.”
그의 목소리가 점점 낮아졌다. 그 말은 공중으로 흩어졌고, 이어지는 건 차가운 정적뿐이었다.
그는 전화를 쥔 손으로 이마의 땀을 훔쳤다. 심장이 이상하게 빠르게 뛰었다.
'왜 받지 않지?'
결국 참지 못하고 집으로 향했다. 아파트 단지에 들어서자, 익숙한 차량이 보였다. 아내의 차였다.
엔진은 꺼져 있었지만, 실내등이 희미하게 켜져 있었다. 그는 다가갔다. 차문을 손끝으로 두드렸다.
톡, 톡—
그제야 아내가 전화를 끊고 고개를 들었다.
“여보…?”
입모양만 움직였다. 그녀의 얼굴엔 놀라움과 당황이 동시에 스쳤다.
그리고, 코끝을 스치는 익숙한 냄새. 주성의 향수 냄새였다. 재형의 심장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여기서 뭐 해?”
그녀가 급히 말했다.
“애들한테 자랑 좀 하려고 왔지. 나 설악 매디오폰드 완주했어.”
“여기 오면 안 돼!”
그녀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튀었다.
“우리… 위장이혼한 거 잊었어? 누가 보면 끝장이야. 지금이라도 빨리 가. 애들 위험하게 만들지 말고.”
“위험? 내가 애들 보러 오는 게 위험이야?”
재형의 목소리가 커졌다.
“그래. 당신 지금 이러면 안 돼.”
그녀는 단호하게 말했다.
“제발 그냥 가. 부탁이야.”
그녀는 시선을 피했다.
그의 가슴속에서 무언가 끓어올랐다. 말하지 않아도 알았다. 그녀는 거짓을 말하고 있었다. 그는 돌아섰다.
그리고,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
며칠 뒤, 재형은 일을 끝내고 곧장 아내가 일한다는 고깃집으로 향했다. 폐점 시간이 훌쩍 넘은 밤이었다.
불 꺼진 가게 안, 창가에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유리창 너머, 아내와 주성이 마주 앉아 있었다.
주성의 손끝이 아내의 손등을 스쳤다. 아내는 미묘하게 웃었다. 그 웃음은 오래전 연애할 때 자신에게 보였던 그것과 똑같았다. 둘은 함께 가게를 나와 주성의 차에 탔다. 재형은 택시를 잡아 뒤를 밟았다.
심장은 점점 빠르게 뛰었다. 차창 밖 풍경은 흐릿하게 늘어졌다.
그리고, 네온사인. 모텔.
택시가 멈췄다. 그는 숨을 몰아쉬며 지갑을 꺼냈다. 손끝이 떨렸다.
"아저씨, 여기서 잠시 기다려주세요.".
그는 계단을 올라갔다. 카운터에서 남편이라고 설득해 받은 키로 모텔문을 열었다.
“이 새끼들…”
욕이 터져 나왔다. 샤워기 물소리가 멈췄다. 젖은 머리의 주성과, 수건으로 몸을 감싼 아내가 있었다.
"뭐 하는 짓이야!”
재형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주성이 비웃듯 말했다.
“아니, 이혼한 여자가 나랑 있는 게 뭐 어때서? 전남편이 이 시간에 왜 모텔을 와?”
“너… 이 자식이…”
주먹이 날아갔다. 주성의 입술이 터졌다. 하지만 그는 곧 재형의 멱살을 잡고 밀쳤다.
“법적으로 아무 문제없잖아! 이혼한 전남편이 왜 난리야?”
그의 목소리는 낮지만, 서늘했다.
“정 억울하면 고소해. 근데 알지? 네 이름으로 된 건 하나도 없잖아.”
그 말에 재형의 온몸이 굳었다. 아내가 그 사이 울먹이며 말했다.
“그만해! 애들 생각해! 당신이 이러면… 애들이 불행해진다고!”
“불행?”
재형의 눈빛이 흔들렸다.
“이미 다 망가졌잖아.”
“이제 가. 나, 주성 씨 사랑해.”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들도 주성 씨 덕분에 잘 지내고 있어. 학원비도 밀리지 않고… 나도 이제 그만 고생하고 싶어.”
그녀는 눈을 돌렸다.
“우리, 이미 끝났잖아. 그러니까… 제발 더는 귀찮게 하지 마.”
그녀의 말은 칼보다 날카로웠다. 가슴이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재형은 무너진 듯 문가에 기대섰다. 눈앞이 흐려졌고 숨이 막혔다.
바로 그때 주성의 비웃음이 들렸다.
“불쌍하긴 하다, 재형아. 그래도 인생 공부는 했겠지?”
그 한마디에, 재형의 완전히 무너졌다.
그는 문을 열고 나왔다. 비가 오고 있었다. 모텔 간판 불빛이 빗방울에 번졌다. 그 불빛이, 마치 비웃는 듯 깜박였다. 그는 주먹을 쥐었다. 하지만 이제, 어디에 내질러야 할지도 몰랐다.
바닥만 바라본 채,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세상이 조용히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