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비가 멈출 때까지

설악 메디오폰도를 완주하고 집에 도착한 영실은,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다시 자전거에 올랐다.

온몸이 땀에 젖어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은 편했고 정신은 맑았다.


어느덧 지원의 미용실 앞이었다. 그는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몇 번이나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다가, 결국 단 한 문장만 남겼다.


지원 씨, 저 미용실 앞이에요.
할 얘기가 있어요. 잠깐만 볼 수 있을까요?


보내고 나서 그는 화면을 바라봤다. 읽음 표시가 떴다. 잠시의 정적 뒤, 답장이 도착했다.


죄송해요. 지금은 그럴 마음이 없어요.


짧은 문장이었지만, 영실은 그 안에서 오랜 시간을 느꼈다.

닫힌 마음의 문, 다가갈 수 없는 세계.

그는 한참 동안 휴대폰을 내려놓지 못했다. 미용실 유리문 너머로 보이던 불빛이, 서서히 어두워졌다.


시간이 흘렀다. 하늘에서 작은 물방울이 떨어졌다. 바닥의 흙냄새가 서서히 비 냄새로 바뀌었다.

비는 처음엔 조용히 내리더니, 곧 거세졌다. 사람들은 하나둘 우산을 펴고 사라졌다. 그런데도 영실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자전거와 함께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헬멧 위로 떨어진 빗방울이 얼굴을 타고 천천히 흘러내렸다.


“이 비가 멈출 때까지는… 기다릴게요.”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시각, 지원은 미용실 안에서 손님의 머리를 다듬고 있었다.
거울 속 얼굴은 평온했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영실의 메시지가 떠오를 때마다, 심장이 묘하게 흔들렸다.

‘이제는, 정말 끝내야 해.’

그녀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아버지의 폭력, 남편의 배신.
그 모든 고통이 이미 알려주고 있었다. 남자는 믿으면 안 된다고.


그때, 문이 벌컥 열렸다.
딸 소연이 젖은 교복 차림으로 들어왔다. 문틈 사이로 빗물이 흘러들었다.

“엄마!”
“왜 이렇게 젖었어? 우산은?”
“비가 갑자기 와서… 근데 엄마, 이상한 사람이 밖에 있어.”
“이상한 사람?”
“응. 자전거 타는 아저씨. 미용실 앞에서 계속 서 있어. 비를 맞으면서도, 움직이지 않아.”

순간, 지원의 손이 멈췄다. 심장이 세게 뛰었다.
“자전거… 타는 사람이라고?”

소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헬멧 썼고, 가게 쪽을 계속 보고 있었어.”


지원은 재킷을 걸치며 급히 문을 열었다. 밖으로 나가자, 비는 이미 폭우가 되어 있었다.

가로등 불빛이 빗물 속에서 흐릿하게 번졌다. 그 속에 영실이 서 있었다. 온몸이 젖은 채, 자전거를 붙잡고 있었다.


지원이 달려와 그를 향해 소리쳤다.
“왜 이러고 있어요! 비를 다 맞고… 미쳤어요?”

영실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얼굴은 젖었지만, 눈동자는 오히려 또렷했다.

“지원 씨… 그냥, 보고 싶어서요.”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깊게 흔들렸다.
“보고 싶고, 만나고 싶고… 지원 씨가 계속 떠올라요. 일을 해도, 자전거를 타도… 자꾸만.”


지원이 숨을 삼켰다. 비가 머리카락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녀는 애써 시선을 피했다.

“이런 얘기… 왜 지금 해요?”

영실은 한 걸음 다가섰다.
“처음엔… 그냥 미안했어요. 그날, 제가 괜히 ‘아무 사이도 아니다’라고 말해서. 근데 그 말을 한 뒤로, 계속 당신 얼굴만 떠올랐어요. 말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았어요.”

그는 떨리는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지원 씨, 저… 당신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잠시 머뭇거렸다가, 그는 눈을 감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
“아니요. 좋아합니다. 정말, 많이요.”


지원의 눈이 젖었다. 그녀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비와 눈물이 뒤섞인 얼굴로 겨우 입을 열었다.

“나… 그런 말 듣기 무서워요. 예전에 믿었던 사람한테 다 줬는데, 남은 게 아무것도 없었어요. 그래서 다시는 사랑 같은 거, 안 하려고 했어요.”

영실은 조용히 손을 내밀었다.
“그럼… 나한텐 아무것도 주지 말아요. 대신, 믿게만 해 줘요. 내가 당신 옆에 있을게요.”

그 말에 지원의 입술이 떨렸다. 그녀는 눈을 감고, 천천히 영실의 품으로 걸어 들어갔다.

“바보같이… 이런 비 속에서.”

영실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이렇게라도 해야… 당신이 내 마음을 믿을 것 같아서요.”


비가 두 사람을 감쌌다. 젖은 공기 속에서 그들의 심장 소리만 또렷하게 들렸다. 두 사람은 서로의 온기를 느끼며 오래도록 포옹했다. 그 품은 따뜻했다. 마치 오래전 잃어버린 무언가를 다시 찾아낸 사람들처럼.


문틈 너머로 그 장면을 바라보던 소연이 속삭였다.

“엄마… 이제 울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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