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다시, 길 위에서

모든 것이 무너졌다. 가정도, 일도, 자존심도.


재형은 한동안 세상을 저주하며 살았다. 낮에는 술로 버티고, 밤에는 술에 잠겼다. 술잔 속에서 그는 자신이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다.

“다 끝났어.”
그 말이 입에 달라붙었다.

하루하루가 비슷했다. 냉장고 문을 열면 소주가 있었고, 그걸 다 마시면… 다시 어둠뿐이었다.


어느 날 새벽, 거울 속의 얼굴이 낯설게 보였다. 눈빛이 텅 비어 있었다. 그 순간 문득 깨달았다.
‘이대로 가면, 정말 죽겠구나.’

그날로 술을 끊었다. 대신 먼지가 쌓인 자전거를 꺼냈다. 아무런 목적지도 없이, 남쪽으로 향했다.

“국토종주라도 해야겠다.”
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길 위에서 그는 무너진 삶의 잔해를 하나씩 버렸다.

낯선 도시의 쉼터, 싸구려 여관, 편의점 도시락.

그곳에서 그는 처음 보는 사람들과 웃고 이야기했다.


공사장에서 만난 청년이 “형님, 힘내요. 사람은 다시 시작할 수 있다니까요.” 라며 커피를 건넸을 때,
재형은 그 커피의 따뜻함을 오래 쥐고 있었다.


강릉의 바닷가에서는 한 아주머니가 그에게 뜨거운 국밥을 내밀었다.
“바람 많이 불지? 그래도 괜찮아. 인생도 바람 불 때가 제일 잘 정리돼.”


그는 조금씩, 다시 세상을 믿기 시작했다. 더 이상 주성과 아내를 미워하지 않기로 했다. 그들이 아니라, 자신이 살아야 할 시간이 많이 남았다는 걸 깨달았다.


국토종주를 마치고 돌아온 날, 그는 더 이상 예전의 재형이 아니었다. 몸은 검게 그을렸고, 눈빛은 오히려 맑아져 있었다. 그를 기다리고 있던 건 영실이었다.

“돌아왔구나.”
짧은 말이었지만, 그 안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영실은 재형에게 조그만 방을 구해줬다.

“여기서 다시 시작해. 그리고… 우리 회사 계열사에 일자리가 하나 나왔어.”

재형은 고개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이 은혜는… 평생 못 잊을 거예요.”

“고맙긴. 다시 일어나면 돼. 너한테 필요한 건 연민이 아니라 훈련이야.”

그날부터 재형은 새벽에 일어나 출근을 하고, 퇴근 후엔 영실과 자전거를 탔다.
조금씩 빚을 갚으며, 땀으로 하루를 쌓았다.


어느 날, 영실이 말했다.
“재형아, 설악 그란폰도 같이 나가자.”

“그란폰도요? 그건… 200킬로 넘잖아요. 전 아직—”

“할 수 있어. 넌 이미 설악 메디오를 끝냈잖아. 이번엔 진짜 네 한계를 넘는 거야.”

그 말에 재형의 눈이 흔들렸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해볼게요. 이번엔 끝까지.”


그 소식은 곧 타이거바이크 단체방에 퍼졌다.

‘재형 복귀 축하!’

‘재형이 힘내라! 언제든 술 먹고 싶으면 연락해!’

채팅창은 순식간에 불이 났다. 석대장과 회장도 직접 연락해 왔다.

석대장은 훈련을 맡겠다고 했다.
“이번엔 완주가 목표가 아니야. 네가 네 한계를 넘는 게 목표야. 내가 옆에서 영실이와 함께 끝까지 끌어줄게.”

회장은 2000만 원이 넘는 최고급 로드 자전거를 사줬다.
“재형아, 이게 내 마음이야. 이제 다시 달려보자.”

재형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자신을 진심으로 응원해 주는 사람들이 아직 남아 있다는 사실이,
오래 굳어 있던 마음을 천천히 녹였다. 오랜만에, 다시 세상으로 들어갈 용기가 생겼다.


그란폰도 출발을 이틀 앞둔 저녁, 재형은 자전거 체인을 닦으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페달 위에서 얻은 인생의 의미가 이제는 자신을 붙잡고 있었다.

“이제야… 조금은 괜찮은 사람으로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그의 입가에, 오랜만에 미소가 번졌다. 그때, 영실이 말했다.

“주성도 나온대.”

재형의 손이 잠시 멈췄다.
“윈드바이크로요?”

“응. 윈드는 이번에 선수급으로 출전한대.”

재형은 고개를 숙였다.


가슴 깊은 곳에서 묘한 불꽃이 피어올랐다. 그것은 두려움도, 분노도 아닌 결의였다.

“좋아요. 이번엔… 진짜 끝까지 가볼게요.”

그의 눈빛이 다시 불붙었다. 그것은 복수의 불이 아니라, 자신을 되찾는 불이었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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