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서 새 한 마리가 바람을 타고 올랐다.
그 모습이 재형의 희미한 의지처럼 하늘에 머물렀다.
조침령 정상에 다다르자, 바람이 매섭게 얼굴을 때렸다. 하늘은 낮게 깔려 있었고, 멀리서 구름이 천천히 넘어오고 있었다. 영실과 재형은 숨을 몰아쉬며 보급소 앞에 자전거를 세웠다. 바닥에 앉자마자 다리가 후들거렸고, 손끝은 떨렸다. 그때, 강렬하면서도 익숙한 향수 냄새가 바람을 타고 스쳤다.
“아니, 이게 누군가 했더니… 인생 패배자 둘이네?”
고개를 드니, 새빨간 ‘WIND BIKE’ 져지를 입은 주성이 서 있었다. 새 헬멧, 최고급 자전거, 눈썹 위엔 여유와 조롱이 섞여 있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바나나 껍질을 까 입에 넣었다.
“한 놈은 사업 말아먹고 위장 이혼까지 한 무능력자, 한 놈은 애 딸린 이혼녀 좋다고 따라다니는 순정바보.
둘이 딱 어울린다. 인생 업힐 중이냐?”
영실의 얼굴이 굳었다.
“말 조심해요.”
주성은 비웃었다.
“아직도 열받아? 나 제명시키니까 기분 좋았냐? 덕분에 지금 더 잘 나가. WIND BIKE 들어간 거 몰랐지? 전국에서 제일 강한 팀. 너희 같은 하위권 라이더들은 감히 명함도 못 내미는 곳이야.”
그는 영실의 자전거를 힐끗 보며 코웃음을 쳤다.
“그걸로 조침령 올라왔냐? 대단하네, 근성 하나는.”
영실이 앞으로 나서며 소리쳤다.
“주성이 형, 그만해요. 지금 도가 지나쳐요.”
주성은 피식 웃었다.
“도가 지나쳐? 내가 너희 현실을 알려준 게 뭐가 잘못인데? 둘 다 자전거 타는 이유가 비슷하잖아. 현실 도망치려고. 한 놈은 빚에 쫓기고, 한 놈은 여자에게 차여서.”
영실이 그의 멱살을 잡으려는 순간, 재형이 황급히 팔을 붙잡았다.
“형, 안 돼.”
“놔, 이런 놈은 그냥—”
“형, 제 아내가… 지금 저 인간 밑에서 일해요.”
그 말에 영실의 손이 멈췄다. 재형의 눈빛엔 분노 대신 좌절이 서려 있었다.
“지금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우리 가족까지 피해 볼 거예요.”
잠시 정적이 흘렀다. 주성은 그들의 침묵을 즐기듯 웃었다.
“그래, 그렇게 살아. 착한 척하면서 꼬리 내리고. 그게 네 방식이잖아, 재형아.”
그는 먹던 바나나 껍질을 아무 데나 휙 던지고 자전거에 올랐다.
“나 먼저 내려간다. 너희들은 푹 쉬다 내려와라. 인생도 느리고 자전거도 느린 패배자들아.”
주성은 짙은 향수 냄새를 남긴 채 내리막길로 사라졌다.
한동안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등성이 위로 바람이 밀려왔다. 영실이 이를 악물었다.
“저 놈, WIND BIKE에 들어갔다고? 그 괴물들이 모인 팀에?”
“그런가 봐요.”
재형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전국에서 로드 가장 잘 타는 괴수들만 들어간대요. 석대장도 거기선 중간 정도라던데.”
영실은 허공을 바라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결국 저런 놈들이 이기는 세상이구나! 참 불공정하다."
재형은 고개를 저었다.
“형, 아니에요. 우린 느려도 멈추지 않잖아요. 그게 진짜 이기는 거예요.”
그의 말에 영실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재형의 눈빛엔 조용한 확신이 스며 있었다.
조침령을 내려오자 마지막 오미재가 나타났다. 끝이 보이지 않는 오르막.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질 때, 재형이 말했다.
“형.”
“응?”
“지원 씨랑… 아직 말 안 해요?”
영실은 한동안 대답이 없었다. 그도 모르게 페달이 느려졌다.
“솔직히 모르겠어. 지원 씨를 좋아하는지. 내 감정이 뭔지 모르겠어. 근데 그녀 얼굴이 자꾸 떠오르고, 보고 싶어.”
재형이 짧게 웃었다.
“형, 그게 좋아하는 거예요.”
“뭐라고?”
“보고 싶고, 얘기하고 싶고, 그녀가 잘 지내는지 궁금하면… 그건 이미 좋아하는 거라고요.”
영실은 잠시 고개를 숙였다.
“그래도 겁나. 내가 실수하고 상처 준 것 같아서.”
“그래도 가야죠. 설악 완주하면 바로 지원 씨한테 가요. 말로만 하지 말고, 형 진심을 보여줘요.”
바람이 두 사람의 이마를 스쳐 지나갔다. 영실은 속으로 다짐했다.
'그래. 이번엔 멈추지 않을게.'
그들은 다시 페달을 힘차게 밟았다. 바람은 거셌고, 오미재는 높았지만, 그들의 페달링은 흔들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