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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라 Sep 12. 2023

낙원의 문을 여는 방법

행복은 여기에 있다.



    '낙원은 일상 속에 있든지 아니면 없다.'


    책을 읽다가 문득 무거운 문장을 마주쳤다. 김훈의 <자전거 여행>에 쓰인 한 마디 단언. 갑작스레 들이닥친 진리에 정신이 아득했다. 낙원은, 일상 속에 있든지, 아니면, 없다. 나는 마치 어떠한 교리를 외듯 온 정성을 다해 한 음절 한 음절을 뇌리에 새겨 넣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 행위의 궁극적 목표를 행복으로 보았다. 모든 인간은 행복하기 위해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의 입장을 반박하고 드는 수많은 과학 담론에게 미안하지만 나 역시도 그의 편이다. 사람을 붙잡고 인생의 '왜'를 묻는 싸움을 계속하다 보면 결국 모조리 행복을 이야기하기 마련이니.


    오랜 시간 우울의 바다에서 근근이 표류했던 나는 최근에 들어서야 거창한 목표를 떠올릴 수 있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결국은 행복이었다. 꿈을, 사랑을, 화합을 이뤄내 종국에는 행복하고 싶었다. 그러니 절실하게 고민했다. 행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내 낙원은 어디에 있는 거야? 언제쯤이면 다다를 수 있어? 의미 없는 물음이 메아리쳐 울리던 가을날의 초입, 몇 명의 문인들이 참을 수 없다는 듯 허공을 찢고 내게 닿았다.


    헤르만 헤세는 <행복>이라는 시를 통해 말했다. '행복을 추구하는 한 당신은 행복할 만큼 성숙해 있지 않다.' 그 시를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성공, 승리, 완수, 발전. 내게 있어 행복이란 그런 단어들과 결을 같이 하는 추상이었다. 간절히 원해야만 찾아와 주는 유성, 수년을 기다려 드디어 맛본 과실. 행복하기 위해서는 처절히 노력해야 한다고,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집착이 눌어붙은 두 눈으로는 감히 헤세의 다정함을 담을 수 없었다. 그런데 김훈의 문장은 조금 달랐다. 낙원은 일상 속에 있든지 아니면 없다, 그 짧은 호흡은 내게 다가온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내리 꽂혔다. 네 일상에 낙원이 안 보여? 그럼 어디에도 없는 거야. 단호한 말 한 토막이 서투른 신념을 산산조각 내는 듯했다. 행복이 없다고는 믿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일상 속에서 행복을 찾아내야 했다.


    나는 가지고 있던 모든 철학책을 쌓아 두고 호기롭게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행복' 두 글자가 들어간 문장이면 어디고 밑줄을 그었다. 이렇게 하면 행복해지고, 저렇게 하면 행복해지고, 그런 틀에 박힌 얘기는 나도 할 수 있겠다 싶어 권태스러울 때쯤 세네카의 손에서 열쇠가 툭 떨어졌다. '지금 들려주는 이야기는 결코 터무니없는 것이 아니다, ' 김훈의 문장만큼이나 결연한 복선과 함께.


    '행복으로 가는 길은 가까이에 있다. 우리는 그저 신들의 도움을 받으며 행복의 문으로 다가서기만 하면 된다.'


    또다시 깨달음이 용솟음쳤다. 다가서기만 하면 된다고. 그래, 나는 지금껏 다가서지 않았구나. 너무 멀리 서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만사를 대했구나. 결국은 모든 것이 내 곁에 있었구나! 나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빛무리가 나를 감싸려 일렁이는 듯한 환상 속에, 비로소 나는 낙원의 입구를 열어젖혔다. 5평의 보금자리를 박차고 나가 두 눈에 세상을 가득 담기 시작한 것이다.


    행복하려면 다가서야 한다. 나를 둘러싼 세상과 호흡을 함께해야 한다. 입추가 한참 지난 9월 초 오늘, 이례적으로 작열하는 여름해가 고단하대도 나를 에우는 조그마한 기쁨들에 입 맞춰야 한다. 푸른 하늘만큼이나 아름다운 뭉게구름, 달궈진 뺨을 스치는 고마운 바람 한 자락, 기다렸다는 듯 나를 반기는 횡단보도 옆 그늘막, 웃음 짓는 아이들. 행복은 그 안에 있었다. 마음이 다가서지 않고는 느낄 수조차 없는 사소한 것 안에. 뺨을 타고 흐르는 땀이 더위를 불평하는 와중에도 나는 찬연히 웃었다.


    하루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며칠 간의 깨달음을 글로 남겼다. 뿌듯함을 안고 침대에 뛰어들어 선물 받은 책을 펼쳤다. 박웅현의 <여덟 단어>. 한참을 집중하다 마주친 문장에서 재미있는 기시감이 느껴졌다. 혼자서 돌고 돌아 그제야 깨달은, 행복에 대한 진리. 행복에 대해 잊지 말라는 듯, 또는 용케 이치를 깨우쳤다는 듯 그의 문장들은 호탕한 웃음을 지었다. '행복은 풀과 같습니다. 풀은 사방천지에 다 있어요. 행복도 그렇고요.'


    아, 낙원의 문을 여는 방법은 이다지도 쉬운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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