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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준 Oct 28. 2023

결혼이란 무엇인가?

영원한 갈등을 위하여

 나의 부모는 올해로 결혼 25주년을 맞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들은 얼핏 보기에도 성격이 서로 맞지 않는다. 거의 상극이라고 불러도 좋다. 그래서 나의 부모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들 불가사의한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본다. "저들은 도대체 어떻게, 왜 결혼했을까?" 나 또한 그 결혼의 소산이었지만, 이 문제는 심각한 연구주제 가운데 하나였다.

 

 여러 가능한 답변들이 경쟁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말했다. "너네 엄마가 너네 아빠를 사람 만들어 놓았"기에 결혼했다고. 또 누군가는 말했다. "너네 엄마 아빠는 서로 열나게 사랑해서" 결혼했다고. 또 누군가는 말했다. "공무원인 너네 엄마의 연금을 위해서는 부부관계의 유지는 필요하기에" 결혼했다고. 그러나 어린 나에게는 이 모든 대답이 약간씩 불만스러웠다. 사람 만들어 놓는다고, 열나게 사랑한다고, 공무원 연금이 있다고 해서 부부관계가 유지되 않을 텐데? 도대체 아빠와 엄마는 왜 결혼한 걸까? 어떻게 결혼한 걸까? 20대에 연애하던 부모의 성격이 지금의 그것과 그렇게까지 다를 것 같지 않다. 도대체 그들이 결혼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이 물음은 부모의 결혼 역사에 대한 장엄한 질문이기도 하다.


  대개 역사가를 착수 단계에서부터 난감하게 하는 문제가 내게는 없었다. 사료라고 부를만한 당대의 인물이 내 눈앞에 버젓이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나는 술에 취한 아버지로부터 일종의 취중진담의 대답을 얻을 수 있었다. "다른 사람을 또 만나서 연애하고, 싸우고, 맞춰가고, 이해하기가 귀찮아서" 결혼했다고.


 로맨스라고는 개미 오줌만큼도 없는 이 대답을 듣고는 나는 이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생각 같은 건 없었다. 역사가도 그렇지 않던가? 사료는 결코 편견 없는 순진한 진실만을 말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아버지의 진술도 편견 없는 사실이 아님은 분명했다. 그러나 가장 믿음직한 진실이기도 했다.



  내가 보기에 아버지의 "귀찮아서" 결혼했다는 말의 함의는, 결혼을 비롯한 인간 사이의 공존에 있어서 반드시 수반되는 갈등을 인정하는 데 있다. 우리는 꽤나 일상적으로 "사람과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데 갈등은 필연적이다"하는 진실을 받아들이면서도, 이 필연으로부터 도망치길 희망한다. 그렇게 긴밀하지 않거나 만나기 불편한  친구와의 만남을 떠올려 보라. 그럴 수도 있지,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만남에서의 갈등을 기꺼이 견뎌낸다. 모든 인간은 다르므로, 그리고 차이는 갈등을 유발하므로. 그러나 나와 현격하게 다른 사람이 결혼 상대가 될지도 모른다고 상상해 보라. 화들짝 놀라 도망치게 된다. 이렇게 다른 사람과는 같이 살 수 없어!


 그리하여 당신이 아무리 당신과 가까워 보이고, 그래서 갈등을 유발할 가능성이 낮아 보이는 사람을 결혼 상대로 열심히 고르고 골라 보아도 그 시도는 빈번히 실패할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다르므로, 그리고 차이는 갈등을 유발하므로.  세상에 당신과 꼭 맞는 사람은, 당신 말고는 없다.



 이것은 내가 연애 상담을 요청하는 지인들에게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이 조언하는 이유와 공명한다. "절대로 연애 상담을 받지 말라"고. 왜냐하면 대개 연애 상담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대답이라고는, 헤어지고 당신과 '잘 맞는' 사람을 만나라는 조언 외에는 달리 없으므로. 그러나 세상에 완벽하게 '잘 맞는' 사람 따위는 없으므로. 갈등은 필연적이고, 그 갈등을 주섬주섬 풀어헤치는 일이야말로 공존하는 일의 본질 가운데 하나이므로. 그 갈등으로부터 도망쳐 나와 '잘 맞는' 사람을 만나더라도, 또 다른 종류의 갈등이 반복될 것이므로. 이렇게 시시포스처럼 바위를 밀어 올리는 일을 반복하다 힘이 다하면 바로 그 밀어 올리던 바위에 깔려 죽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므로. 당신이 밀어 올리던 바위의 모양새나 만듦새가 바뀐다고 이 운명이 바뀔 리는 만무하므로. 그러므로 무책임하게 바위를 갈아치우는 대신, 허무하게 사라질 당신의 애인을 담담하고 정열적으로 사랑하라고. 그러다 기력이 다하면 당신이 밀어 올리던 바위에 기꺼이 당신의 시체를 내어주라고, 물론 당신이 어떤 결단으로 시시포스적 삶을 거부할 수도 있겠지만, 그 또한 바위 밀어 올리기의 연장이기에. 당신은 결국 당신을 깔려 죽게 만들 바위 밑에서 기력이 다한 비루한 시체가 될 운명이지만, 적어도 어떤 바위에 깔려 죽을지는 스스로 결정할 자유는 우리에게 선고되었으므로.


 이렇게 나의 아버지의 "귀찮아서" 결혼했다는, 로맨스로부터 백억 광년 떨어진 언술은 세상에서 가장 로맨틱한 이야기로 뒤바뀐다. 아버지는 왜 "귀찮았던" 걸까?

왜냐하면 나의 어머니가 당신의 최선이었으므로. 다른 여인을 만나도 갈등은 필연적이고, 다른 여인과 그 갈등을 빚기란 너무 "귀찮아서", 차라리 어머니와 영원한 갈등을 빚기로 결단한 것이다. 그 바위 밑에 언젠가 깔려 죽을 운명을 알고도 그 운명을 결단한 것이다.


 나의 부모의 결혼 스토리는 결코 '로맨틱'한 것이 아니었지만, 낭만적(romantic)인 것이었다. 그들의 세계에는 젖과 꿀이 흐르지 않았다. 그러나 실로, 젖과 꿀이 질질 흐르는 낙원은 없다. 그들은 그것을 알고 있었고, 그리하여 낙원이 아닌 지상에서 영원히 갈등하기로 결단했다. 왜냐하면 그 아닌 다른 상대와 무려 '영원히' 갈등하기엔  너무나 "귀찮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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