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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준 Feb 15. 2024

정신승리도 승리다.

명절과 차례가 싫은 당신에게

 명절마다 지내는 차례와 제사가 싫은가? 제사 도중 복통을 호소하며 화장실에서 똥을 누는 것이 좋은 방법이다. 그리고 생각하라. 이 경건해야 할 관습을 내가 똥을 눔으로써 흩어냈노라고. 가족과 폭력적으로 대립하기보다는 은근히 저항하라. 전복할 수 없다면 전유하라. 승리할 수 없다면 정신승리를 하라. 정신승리도 승리다.


"까치 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 우리 우리 설날은 오늘"이라는 동요가 무색하게도 명절에 싫증을 느끼는 이들이 대개 있다. 나도 그렇다. 그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특히 차례로 위시되는 제사가 싫다. 일단 딱히 면식이 없는 죽은 이를 위해 새벽 댓바람부터 음식을 늘어놓고 병풍에 절을 하는 게 싫다. 아침에 일어나는 일은 나에게 정말 고되다. 번째로  제사의 수혜자인 죽은 자가 딱히 제사에 감동할 같지도, 그리하여 자에게 딱히 보상을 돌려주리라고 기대하기 어려워서 싫다. 제사가 근본적으로 동아시아의 효孝의 이념을 계승한 것일진대, 일반적인 효도와 달리 제사는 별로 떡고물이 떨어지지 않는다. 당장 안방에 가서 어머니의 어깨를 주물러 보라. 용돈을 받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죽은 자는 말이 없기에, 아침부터 부산스럽게 차례를 지내고 절을 해도 죽은 자는 입을 굳게 다문 채 응답해주지 않는다.  


 차례를 지내는 한국의 기성세대가 들으면 노발대발할 것만 같은 이런 입장은, 사실은 오늘날 제사 문화의 근간인 이른바 '유교'의 탄생에서부터 함께 해 온 생각이다. 이른바 유교의 창시자라고 불리는 공자의 라이벌이었던 묵자는 제사 문화를 비판하며 이렇게 말했다. "귀신이 없다고 주장하는 동시에 제사 지내는 예를 공부하는 것은 손님이 없는데 손님 맞는 예를 공부하는 것과 같고, 물고기가 없는데 그물을 만드는 것과 같다." 그러나 공자는 『논어』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예를 가지고 나라를 다스릴 수 없다면 예를 어쩌랴."(不能以禮讓爲國 如禮何) 즉 공자에게 제사란 단지 죽은 자에게 절하고 떡고물이 떨어지길 바라는 일이 아니라 정치의 수단이었으며, 죽은 자를 넘어서 산 자의 삶을 규제하는 리추얼이었다.  간단히 말해, 본래 공자가 말하던 제사란 죽은 자를 위한 것이라기보단, 산 자의 경건함을 위한 것이다. "삶도 모르는데 죽음을 어찌 알까?"(未知生焉知死)


 확실히, 제사든 뭐든 어떤 리추얼이 제대로 이루어진다면 왠지 모르게 마음속이 경건해지는 체험을 할 수 있다. 미사가 끝난 성당에 가만히 앉아있어 보라. 스테인드 글라스에 비친 빛이 성당 안에서 고요하게 비치는 것을 응시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숨죽인 채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마음이 된다. 석굴암의 불상 앞에 서 보라. 그 웅대한 크기와 불상의 분위기는 당신이 그 불상을 바라보는 동안 당신을 불자로 만들 것이다. 나도 리추얼의 힘을, 사람을 경건케하고 삶을 규제하는 힘을 모르지 않는다. 다만 오늘날 제사는 그런 경건성을 불러일으키기에는 딱히 아름답지 못할 뿐,  그리하여 제사를 지내더라도 효심이 좀처럼 생겨나지 않는다. 이것이 오늘날 제사에 내가 가진 주된 불만이다. 사람을 너무 많이 귀찮게 해서라기보단, 사람을 너무 귀찮게 하지 않은 나머지 본래의 리추얼로서의 의미를 잃어버렸다는 점.


 그렇다고 이른바 '정통'으로 회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한 번 변질되어 버린 관습을 원래의 형태로 인위적으로 회복시키는 일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원래의 형태'를 운위하는 일 자체가 이미 '변질된 형태'를 의식하는 일이고, 겉보기에 관습을 원래의 형태로 되돌린다 하더라도 이미 '변질된 형태'를 의식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제사를 다시 이른바 '정통 유교' 식으로 해본다고 생각해 보라. '아니, 왜 이제 와서?' 하고 불만을 갖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본래의 리추얼로서의 의미도 귀신에게 효도하고 떡고물을 받을 의미도 잃은 제사는, 내가 특별히 싫어하지 않더라도,  자연스럽게 소멸하게 될 것이다. 2023년 기사에 따르면 차례나 제사를 지내지 않는 인구가 어느덧 60%를 넘었다고 한다. 이것은 정통의 상실도 아니요, 효를 잊은 오늘날 'MZ 세대'의 방종에서 기인한 것도 아니다. 생애주기를 마친 인간이 죽음을 향해 달려가듯, 의미를 잃은 리추얼이 맞이하는 소멸의 길이다.


 제사는 이미 천천히 소멸할 운명이 점쳐졌다. 그런데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나처럼 제사가 싫은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제사는 그다지 '민주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기에, 기성세대의 독점적 권력행사의 압박이 될 때가 많기 때문이다. 그런 이에게 제사에 대한 불만은, 제사 그 자체에 대한 불만이라기보다는 기성세대의 제사에 대한 독점적인 권력 행사에 대한 불만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나 같은 사람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1789년 프랑스에서처럼 피의 혁명이라도 해야 할까? 80년대 한국처럼 목을 콜록거리며 기성세대를 향해 데모라도 해야 할까?


 미국의 정치학자 제임스 스콧에 의하면 피지배 계층이 지배 계층에 대해 저항할 때, 데모나 혁명과 같은 가시적인 형태뿐만 아니라 은근하게 드러나는 형태로도 저항할 수 있다고 말한다. 통계에 잡히지 않고, 어떤 '사건'으로 기억되기보다는 일상적인 순간들에서 드러나는 소소하고 확실한 저항들. 에티오피아의 한 속담은 이렇게 말한다. “지체 높은 귀족이 지나갈 때 현명한 농부는 고개 숙여 절한 다음, 소리 없이 방귀를 뀐다.” 가족의 기성세대와 저항할 때는, 가시적으로 반목하는 일보다는 이런 전략이 유효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웃어른을 공경하라는 것이 제사의 본래 목적 아니겠는가?


 그러니 제사가 싫다면, 가족의 기성세대에 저항하고 싶다면 제사 도중 '급똥'을 누러 가자. 그리고 아무도 듣지 않는 변기 위에서 나직하게 속삭이자. 조상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똥을 누는 동안 당신의 작은 리추얼이자 정신승리는 당신의 위장과 영혼을 깨끗하게 비우고, 화장실을 나서는 당신은 승리자의 당당한 걸음걸이와 한결 경건해진 마음으로 제사의 리추얼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 정신승리도 승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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