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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준 Jun 22. 2024

이 영화의 주제는 "악의 평범성"이  아니다.

「존 오브 더 인터레스트」: 인간의 해석과 해석의 세계

*2023년 영화 존 오브 더 인터레스트」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해석은 세계와 무관한가


     대학원에서 철학과 사상을 공부하게 되었다. 내가 그것을 세부적으로 공부하기로 정하기 전이든 후든, 많이들 그리고 자주들 물었다. "철학이든 사상이든 그런 게 현실이랑 무슨 상관인데?" 하고. 철학이나 사상이 현실과 유리된 뜬구름 잡는 소리로 보일 수 있다. 그리스의 희극 작가 리스토파네스가 그의 희극 《구름》에서 소크라테스를 뜬구름잡는 사람으로 비꼬는 것을 보면, 꼭 오늘날 이른바 인문학의 위기 때문에 이런 시각이 존재하는 건 아닌 듯하다. 그 스스로도 철학자인 마르크스다음과 같이 말하지 않는가. "철학자들은 세계를 단지 여러 가지 방식으로 해석해 왔다.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철학이나 사상이 세계를 해석하는 일보다도, 현실에서 변화시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철학자 스스로가 이런 말을 하는 저의는 둘째치고 나서, 나는 이렇게 되묻고 싶다: 현실을 해석하지 않고서도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는가?; 현실의 해석보다 그 변화를 선행시킬 수 있는가?; 다시 말해 현실의 해석과 변화는 과연 유리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현실과 해석 사이의 관계를 정의하기를 요구한다. 사상은 도대체 현실을 어떻게 해석해내는가, 그리고 현그러한 사상으로부터 어떻게 영향을 받는가? 내가 보기에 이 주제에 대해 질문하고 대답하는 가장 가까운 텍스트는  2023년 개봉한, 그리고 한국에는 2024년 수입된 「존 오브 더 인터레스트(The zone of interest)」인듯하다.  


이것은 '악의 평범성'이 아니다.

   

     영화의 대략적인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영화는 한 가족의 '일상'을 다룬다. 문제는 그 가족이 2차대전 중 홀로코스트 전쟁범죄의 부역자들이라는 것이다. 나치 독일의 고위 장교 루돌프 회스와 그 가족은 아우슈비츠와 콘크리트 벽 하나를 경계로 살고 있다. 벽 너머로는 끊임없는 총성과 비명이 들리지만, 루돌프와 그 가족은 그 소리들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영화는 루돌프 가(家)의 일견 평범해 보이는 가십거리와 가족 내의 크고 작은 사건들을 그리지만 관객에게 그 사건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오히려 관객에게 중요한 것은 이 사건들의 내용이 아니라 배경이다. 루돌프 일가는 여느 가족과 마찬가지로 일상적이나,  그 일상은 아비규환의 시체 더미 위에 세워져 있다. 그러한 끔찍한 인종 청소의 현장 건너편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일상을 영위하는 이들에 대한 기이함 내지는 기묘함이 영화를 끝까지 볼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다.

    이 영화에 대해 몇몇 평론가들을 비롯해 관객들은 대체로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과 결부하여 해석하는 듯하다.  이 글의 제목에서 알렸듯이, 나는 이러한 해석에 반대한다. 영화의 취지나 연출과 어긋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석이 전혀 일리 없는 것은 아니다. banality가 '평범성'이라는 말보다는 '진부함'이라고 번역되는 것이 더 적절해 보인다는 점을 고려하면 banality of evil 개념으로 영화를 해석하는 건 꽤 그럴듯해 보인다. 영화의 루돌프 일가는 매우 평범하고 담담하게 자고급 코트가 유대인 누구로부터 빼앗은 것인지,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유대인을 소각할 수 있을지, 마치 카페에서 수다를 떨 듯 평범한 공무를 집행하듯  '진부하게' 이야기를 나누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유대인 학살이라는 '악'이란, 대단히 진부하고 평범한 것다. 실로 아렌트가 banality of evil 개념을 제시한 맥락도 나치 독일의 아이히만이 얼마나 '관료적으로' 유대인들을 살해했는가를 포착한 데 있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하면 여러모로 당신이 한 관객으로서 이들이 담지하고 있는 '악의 평범성'에 역겨움을 느끼는 일도 응당하다.

    그러나 나는 영화를 그렇게 해석하는 일 공정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 까닭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이 영화는 고통받는 유대인이나 오늘날 관객의 시선이 아니라, 루돌프 일가의 시선으로 바라봐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굳이 평화로운(?)  루돌프 일가의 생활세계를 영화에서 장시간 담아낼 이유가 없다. 물론 이들이 홀로코스트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인식은 오늘날 기준에서나 객관적으로나 그리 믿을만하지 않지만, 이들의 시선을 전적으로 무시하거나 괄시하는 것은 영화에 대한 공정한 해석일 수 없다. 나치의 부역자들이 손님을 잘 접객할 줄도 알고, 가족과 여유로운 주말을 보낼 줄도 알며, 동물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는 걸 구태여 길게 묘사하는 것은 그들의 생활세계를 포착해보겠다는 의도인 것이다. 만약 그러지 않을 요량이라면, 기존의 할리우드를 위시한 영화계에서 그러듯 나치 독일의 부역자들을 철저히 악마로 그렸을 것이다. 둘째로, 영화는 이 영화의 주인공(?)인 루돌프 일가의 시선과 관객의 거북한 시선 사이의 괴리를 통해 주제를 전달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화면에서 비춰지는 따스한 가족의 풍경과, 관객이 영화에서 느끼는 꺼끌거리는 이물감을 영화는 압도적인 사운드로 표현해냈다. 이는 영화를 보면 명백다. 그런데 내가 지적한 첫 번째 지점, 즉 영화의 시선이란 루돌프 일가의 시선이라는 것과 결부하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이 영화의 해석은 루돌프 일가를 따라가되, 등장인물과 관객의 감상 사이의 괴리에 파묻혀 있는 메시지를 풀어내야 한다.

    루돌프 일가의 시선에 따라 영화를 읽으면 통상 '숭고한' 것으로 그려졌을 법한 장면들이 매우 불쾌한 방식으로 연출되었음을 금방 알 수 있다. 영화의 중간에는 어두운 화면이 흑백으로 반전되며, 루돌프 가의 하녀인 폴란드 소녀가 아우슈비츠의 유대인들을 위해 몰래 사과를 숨겨두는 장면이 난데없이 등장한다. 이 장면의 바탕에는 내장을 헤집는 듯한  굉장히 불쾌한 저주파 음향이 깔려 있다. 소녀가 몰래 흙더미에 사과를 두는 모습은, 어두운 화면과 불쾌한 음악과 함께 흡사 바퀴벌레가 알을 낳는 모습으로 보이기도 한다. 통상의 나치즘을 비판한 작품이라면, 이렇게 불쾌하게 연출할 이유가 없다. 나치 독일의 핍박에도 인류애를 잃지 않은 따뜻하고 아름다운 개인의 분투로 연출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둠이 내려앉은 후 폴란드 소녀의 유대인을 위한 비밀 자선 활동이 흡사 바퀴벌레의 산란과 겹쳐 보이는 건 그 행동이 나치 독일의 부역자인 루돌프 가의 시선에는 실로 바퀴벌레의 산란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영화 내내 배경음처럼 들리는 총성과 은은한 비명 소리는 영화의 러닝타임이 지남에 따라 머지않아 동네 공사장에서 울려 퍼지는 소음과도 흡사하게 들린다. 물론 소음이며 거슬리는 소리긴 하지만, 그 출처는 별로 궁금하지도 않고 얼른 그쳤으면 좋겠는 바로 그 소리들 말이다. 영화 전체에 걸쳐서 유대인에 대한 학대를 포함해 유대인 자체가 별로 화면에 잡히지 않음도 주목할 만하다. 여러모로 루돌프 일가의 시선에서 유대인은 애초에 시야에 들어오는 '관심'의 대상조차 아닌 것이다. 루돌프 일가에게 아우슈비츠는 '이해관계 구역 the zone of interest' 일지 모르지만, 정작 거기 수용된 유대인들에게는 일말의 관심(interest)조차 없다는 점에서 영화가 그려내는 아이러니가 심화된다.

  위와 같은 점을 고려하면 영화를 단지 '악의 평범성' 개념의 틀로 해석하는 일은 외려 영화가 그려내는 아이러니를 포착하지 못할 공산이 있다.  '악의 평범성' 개념이 또 워낙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에, 관객은 거의 편집증적으로 영화의 등장인물들을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 욱여넣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악의 평범성' 개념은 영화가 러닝타임 내내 그려내는 나치 독일의 '일상적' 시선을 포착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일상'은 뭔가 잘못된 것이므로 얼른 악의 세계로부터 각성할 것을 요구하는 셈이 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영화가 '악의 평범성'을 잘 그려내고는 있지만, 영화의 독법이 '악의 평범성' 하나뿐이라면 곤란하다. 왜냐하면 '악의 평범성'이라는 독법으로 영화를 따라가면 우리는 루돌프 일가에게 혐오감 이상의 감정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무지몽매하고 사악하면서도 뻔뻔하게 일상을 살아가는' 루돌프 일가를 어떻게 혐오하지 않고 배길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영화의 연출은 굉장히 고의적으로, 이들을 혐오스러운 시선으로 담아내는 대신 따뜻하고 가족적인 시선으로 담아낸다.  '악의 평범성'이 영화의 독법이 된다면 루돌프 일가의 '외부에서' 그들을 비판하고 비난할 수는 있을지언정, 영화 '내부에서' 그들 가족 구성원이 유대인들에게 던지는 아주 일상적인 시선을 포착하지 못하는 것이다.  앞서 말한 '루돌프 가시선에서 보아야 함'이라는 전제와 어긋난다. 게다가, '악의 평범성' 개념은 아렌트에 따르면 무사유(thoughtlessness)에서 기인하는데, 영화의 루돌프 일가는 사유하지 않는 존재가 전혀 아니다. 이들은 그들 나름대로 가족, 동물, 직업 등에 대해 진지하게 사유하는 존재일진대, 유달리 유대인에 대해서는 놀랄 만큼 무관심할 뿐이다. 요컨대 루돌프 일가는 마치 '평범하고 진부하게 악을 저지르는' 듯하지만, 그러한 방식으로만 영화를 이해하는 일은 영화의 시선을 무시하는 일이 된다.  그러므로 화의 주제는 단지 '악의 평범성' 아니다.

    


사람이 사람이 아니라 해석되는 세계


    대신 내가 제안하고자 하는 은 앞서 마르크스 이야기를 했던 맥락과 연결된다. 돌프 일가가 그 평범성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을 핍박할 수 있는 건 그들이 그러한 방식으로 세계를 해석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해석(들)은 나치 독일의 세계를 창조해냈다.

 루돌프 일가의 구성원들이 유대인의 비명소리에 무덤덤하고, 유대인 하녀에게 "너 같은 걸 잿더미로 만드는 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특별히 사악하고 악마적인 영혼의 현현(顯現)이라서가 아닐지 모른다. 그들은 단지 특정한 방식의 해석을 취했을 뿐이다. 유대인은 동료 인간이 아니며, 그저 말이 통하는 가축 정도의 지위를 지닌다는 해석을. 핍박받는 유대인의 비명은, 마치 공업 지대의 일상적 소음처럼 또 마치 가축이 도축될 때의 소음처럼, 이른바 '혐오시설'의 총책임자를 가장으로 둔 가정인 이상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 하는 것으로 간주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 '혐오시설'에 딱 달라붙어 사는 집안의 어머니 헤트비히는, 마치 공동체를 위해 'NIMBY(Not In MY BackYard)' 대신 제 나름의 '현명한' 해결책을 찾았다는 듯 자랑스럽게 말한다. 수용소의 벽이 보기 좋으니 그걸 가리려고 포도를 잔뜩 심었다고. 그들은 유대인을 동료 인간으로 해석하는 대신, 말 통하는 가축 정도로 해석했던 것이다. 유대인의 비명을 들으면서도 그것을 '사람'의 비명이라 해석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기에 대관절 비명을 들으면서도 곤히 잠에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인간으로서 가히 다른 사람을 동료 인간으로 해석하지 않을 수 있냐고? 인권 개념이 널리 자리 잡은 오늘날의 인식과는 달리, 실로 여자와 노예, 흑인과 어린아이 등은 굉장히 긴 시간 동안 동료 인간이라기보다는 사물에 가까운 취급을 받아왔다. 위대한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노예의 영혼으로 태어난 사람이 있고, 그는 차라리 노예로 부려짐이 더 낫다고 말했다. 그로부터 한참 시간이 흐른 뒤 스타덤에 오른 니체는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라고 인간 찬가를 쏟아내면서 동시에 여성에 대한 비하를 수없이 뱉어냈다. 그에게 '인간'의 범위에 여성은 포함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듯 간의 해석에 따라, 그 대상의 의미와 존재방식이 규정되어 온 일은 생소한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유대인을 동료 인간으로 해석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에 '어떻게 그럴 수 있지?!' 하고 당신이 분개하는 일도 자연스럽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불과 몇십 년 전 한국 사회는 키우던 개를 잡아먹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해석되던 사회였음을. 오늘날 애견인인 당신이 '어떻게 그럴 수 있지?!' 하고 분개하더라도, 불과 몇십 년 전 한국은 키우던 개를 자연스럽게 잡아먹었다. 그것이 당시 그들이 키우던 개를 해석하던 방식이었으므로. 나아가 오늘날 애견인의 세계와 보신탕의 세계 그 존재방식이 같을 리 없다.

    이렇듯 루돌프 가의 시중을 드는 두 유대인 하녀들은 '인간이 아닌 것'으로 해석된 나머지, 실로 인간이라기보다는 청소기나 식기 세척기 등의 가전기구에 가까운 존재로 보인다. 아내 헤트비히 가 루돌프와 말다툼을 하는 장면에서 청소하던 하녀가 복도 한가운데서 조용히 찌그러져 있는 장면, 루돌프가 유대인 소녀를 범하고 고간을 닦는 장면은, 이들이 유대인에 대한 착취를 전혀 동료 인간을 부려먹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오늘날 청소 도중 부부싸움으로 홧김에 청소기에 화풀이를 하는 '일상적인' 사람들처럼, 헤트비히는 집안의 '가전기구'인 유대인 소녀에게 화풀이한 셈이다. 아내와의 다툼 이후 포르노를 집어 들고 자위로써 그 분노를 가라앉히는 '일상적인' 사람들처럼, 루돌프는 집안의 '가전기구'인 유대인 소녀를 '사용'한 것이다. 이렇듯 루돌프 가를 비롯한 나치 독일 전체가 유대인을 '인간이 아닌 것'으로 해석하기로 결정하자, 그들은 실제로 인간이라기보다는 가전기구에 가까운 존재가 되었다. 당신은 가전기구를 좀 험하게 대한다고 해서 죄책감을 느끼는가? 그 가전기구가 뼈와 살의 육신을 가지고 있으며 말이 좀 통한다고 해서 사정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는다.

    그리하여 영화에서 시종일관 느껴지는 불쾌감은 루돌프 가 구성원들에 대한 혐오감으로부터, 관객인 나 자신에 대한 불신으로 방향을 튼다. 과연 내가 영화 속 독일인이었다면, 과연 내가 2차 대전 당시 나치의 부역자였다면, 나는 유대인을 사람으로 대할 수 있었을까? 나의 부모, 형제, 가족, 친구 모두가 유대인은 사람이 아니라고 가르치고 그들을 사물로서 대한다면 유독 나만이 그들을 '도덕적으로' 대할 수 있었을까? 관객은 이런 질문들에  러닝타임 내내 강타당하며, '그렇지 않다'고 담담히 말하는 영화에 의해 구역질 느끼는 체험을 하게 된다. 그 구역질의 방향은 역시 "사악하고 뻔뻔한" 루돌프 일가를 향한 게 아니라,   "사악하고 뻔뻔한" 나 자신으로 귀착된다. 렇지만 이것은 전혀 능동성이나 주체성의 문제가 아니다. 공동체 차원에서 태어날 때부터 '가스라이팅'을 해댄다면 그것을 거스르고 유대인에게 인륜적 도덕 감정을 느끼는 일은 한없이 희박하다. 아니, 애초에 도덕의 대상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았을 공산이 크다. 당신은 가전기구를 도덕적 대상으로 여기는가?

 


해석은 세계와 어떻게 상호작용하나.


    이렇게 본다면 세계는 단지 인간에 의해 해석될 뿐만 아니라, 세계가 인간의 해석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치 독일에 의해 유대인이 인간이 아닌 것으로 구성되었듯, 꽤 머지않은 과거까지 한국인들에 의해 개는 보신탕의 재료로 구성되었듯이. 인간이 세계를 해석하는 방식은 단지 주어진 현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와 더불어 그러한 현실을 직접 변혁시키는 일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해석이란 실재하는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이지만, 오히려 세계 자체가 해석에 의해 구성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나치 독일이 집단적으로 유대인을 '인간이 아닌 것'으로 해석하자, 그들은 실제로 인간이 아니게 되었다. 영화는 그 생생한 생활세계에서 인간이 아닌 유대인들의 세계를 포착해낸다. 그러므로 글의 서두에서 제시한 마르크스의 말인 "철학자들은 세계를 단지 여러 가지 방식으로 해석해 왔다.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이렇게 대답할 수 있는 것이다: 세계의 해석이야말로 곧 세계의 변화이다.

   나치 독일이 유대인을 동료 인간으로 해석하지 않게 된 것은, 홀로코스트의 세계가 직조된 것은, 공동체 차원에서의 '가스라이팅'에서부터 기인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내가 앞서 말한 대로, 루돌프 일가족이 그 자체로 사악하고 악마적인 사람이 아니므로, 그들의 사상은 국가와 사회의 이데올로기로부터 종속된 것이다. 스로 해석하기를 포기한 것이다. 그렇기에 루돌프 일가의 막내 도련님조차도 등교 시에 히틀러의 바로 시그니쳐 포즈를 취하며 가방을 멘다. 그들이 나치 독일로부터 세계의 해석틀이 강제로 주입된 것이든, 아니면 스스로 나치 독일의 해석틀에 편승한 것이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루돌프 일가를 위시한 당시 나치 독일인들은 인간과 세계와 나아가 인식 전체를 아우르는 해석의 방법론에 있어서 외부 공동체에 온전히 의탁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들이 세계를 해석하는 방식은 곧 실제 세계를 구성해 왔다. 그들은 죄책감도 못 느끼고 유대인을 학살한 뻔뻔한 악인들이라기보다는, 심드렁하고 귀찮게 '일'을 한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애당초 유대인은 죄책감의 대상 자체가 아니라고 여겼을 가능성이 큰 것이다. 그 배경에는  '이들은 인간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당시 공동체의 속삭임이 있다.



검은 개와 구토


    그러나 우리의 세계에 대한 해석에는 단지 공동체와 국가와 집단에 외주 맡기는 것만 있는 것도 아니다. 뇌를 외부 세계에 의탁하지 않아도 인간은 스스로 되묻고 해석할 수 있는 지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외부세계와 무관하게 인간은 그 스스로 나름의 해석틀을 구성하고 외부세계의 해석틀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기도 한다. 그러한 사례가 바로 내내 화면에 잡히는 '검은 개'와, 영화 종반부의 '구토'라고 생각한다. 영화의 평화로운(?) 장면 내내, 화면에는 항상 검은 개가 포착된다. 이 검은 개는 후반부에 루돌프가 근무처를 옮겨도 그의 시야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그는 종과 이름이 다른 또 다른 검은 개와 산책로에서 마주치기 때문이다. 이 개와의 조우 이후, 상기한 내장을 헤집는 불쾌한 음향이 흘러나온다. 그러고 머지않아 영화의 종반부에 루돌프는 속이 메스꺼운 의사에게 건강검진을 받지만,  신체적으로는 굉장히 건강하다는 판단을 받는다. 하지만 영화가 끝나기 직전 그는 어두운 복도를 따라 계단을 내려가다 두차례 헛구역질과 구토를 뱉어낸 후에, 새카만 계단 속으로 걸어 들어가며 영화는 끝난다.

    나는 이 일련의 장면들이, 세계에 대한 인간의 해석이 단지 외부세계에 의탁되고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 장치라고 본다. 비록 루돌프 일가가 유대인을 동료 인간으로 해석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유대인은 인간과 같이 팔다리와 오장육부를 가진 육신을 가지고 있다. 그러한 육신을 반복적으로 해치는 일은 그에게 우울증적이고 병리적인 영향을 미쳤을지 모르는 일이다. 이는 겉으로 드러나는 병이라기보단, 그의 무의식 세계의 뒤틀림과 우울증을 낳았을지 모르는 일이다. '검은 개'는 윈스턴 처칠이 우울증을 심하게 앓던 당시에 그가 우울증을 가리키던 말로 잘 알려져 있다. 어쩌면 영화에서 시종일관 포착되는 검은 개는, 루돌프가 (외적 해석틀에 의하면) 인간이 아닌 유대인을 학대하는 데 있어 (내적 해석틀에 의하여) '인간적인' 거부감 사이의 분열에서 발생한 무의식적 우울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영화의 막바지에 유대인 대량 학살의 묘수를 떠올리고 기뻐하며 아내에게 이야기한 후, 헛구역질과 토악질을 뱉어낸 것은, 의탁된 해석과 자발적 해석의 분열과 괴리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마치 영화의 시선과 관객의 시선이 불협화음을 만들어낼 때 우리가 역겨움을 느끼는 것처럼, 루돌프의 심상 세계에서도 일종의 시선의 불일치가 있었던 게 아닐까? 인간이 아닌 유대인과, 찌르면 피를 흘리는 유대인 사이의 괴리에서 영혼이 진동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영화는 이 물음에 제대로 대답하지 않았다. 외부 공동체의 사상적 압박에도 불구하고 인간 내면의 도덕성이 어떻게 꿈틀거릴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을, 영화는 끝내 하지 않는다. 영화의 시작과 끝은 기괴한 음악과 검은 스크린으로 칠해져 있을 뿐이다.  마치 그런 대안적 비전은 이야기하지 않겠다는 양, 2시간 남짓의 시간 동안의 시선에 밝은 대안은 없으며 영화는 암흑 속을 응시할 뿐이라는 양. 어쨌건 루돌프는 헛구역질을 멈추고, 바닥이 있을지 모를 깊은 어둠 속으로 침잠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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