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쩔수가없다》논평
이 글은 박찬욱 감독의《어쩔수가없다》에 대한 논평이며, 독자가 영화를 이미 감상했을 것이라는 것을 전제로 작성한다. 당연히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거니와, 영화를 완독 하지 않았다면 글을 이해하는데 장애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을 먼저 밝혀둔다.
코미디는 코미디로
《어쩔수가없다》는 호불호 갈리는 영화다. 영화에 불호 의견을 표명하는 관객들의 주된 비판은 "주인공 만수(이병헌 분)가 살인을 저지르는 동기가 납득되지 않는다" "어쩔 수가 없다는데, 실은 어쩔 수 있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그렇다. 만수의 살인은 그 동기가 빈약하고, 작중 미리(손예진 분)와 아라(염혜란 분)의 입을 통해 말해지듯 만수가 반드시 제지회사에 재취업해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만약 이 영화가 진지한 스릴러, 추리물이었다면 이런 비판은 지당한 비판이다. 그렇지만 이 영화는 이 불합리를 연출과 미장센으로 밀어붙이고, 여기서 창출되는 부조리로부터 비틀린 웃음을 만들어내는 블랙코미디이다. 그러므로 이 격언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코미디는 코미디로!"
실로, 액션이나 범죄 스릴러 장르라고 한다면 세세한 부분에서 따지고 들 만한 것이 한두 개가 아니다. 일단 만수의 범행 도구부터 문제다. 총기 소지가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는 한국에서 총알은 어디서 구했는가? 민가에서 총성이 울렸는데 왜 아무도 신고하지 않았는가? 기껏해야 일곱 발 장전되는 북한제 67식 권총은 왜 단 한 번의 재장전 장면도 없이 '무한히' 발사되는가? 이런 질문들은 이 영화에서 할 필요가 없다. 만수가 구범모(이성민 분)에게 총을 겨누며 형형색색의 장갑을 마트료시카처럼 벗어젖힐 때, 이런 '현실적인' 질문들은 말 그대로 공중분해된다. 마치 개그콘서트의 코너 〈달인〉에서 달인 역의 김병만 씨가 왜 이렇게 허접한 역할로 나오냐고 질문할 필요가 없는 것과 같다. 마찬가지로 만수의 범행 동기가 합리적인지 아닌지를 자세히 질문할 이유가 없다. 그것은 개그를 놓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개그맨을 무안하게 만드는 일이다. 중요한 건, 그를 둘러싼 배경, 그의 살인, 범행 도구, 피해자들, 그의 가족, 그의 집, 그의 결말, 그리고 만수라는 사람 자체가 무엇에 비유되고 있으며 그것이 왜 비틀린 웃음을 자아내느냐 하는 것이다.
사람과 나무의 비유
동아시아 전통에서, 사람은 자주 식물로 비유되어 왔다. 우리가 사람에 대해 일상적으로 쓰는 '함양'(涵養)이라는 말에서 涵은 물을 준다는 뜻이고 養은 길러낸다는 뜻이다. 涵이라는 글자만 보더라도 식물이 뿌리박고 있는 화분(函)에 물(氵)을 준다는 의미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주자학의 수양론에서 핵심을 이루는 것도 바로 이 함양 공부에 있다. 주자학의 연원이 되는 맹자는 사람의 선한 본성을 길러내서 도덕적 인간으로 완성되는 것을 식물의 씨앗과 생장의 관계로 설명한 바 있다.
사람이 식물로 비유되어 온 철학 전통을 감독이 알고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 전통의 연장선에서 영화 내내 사람은 나무로, 나무는 사람에 비유된다. 주인공 만수는 나무로 되어 있는 휴대폰 케이스를 사용하고, 분재를 취미로 하며, 나무를 다루는 제지회사 '태양'에 근무한다. 만수의 첫 등장에서 가족들을 끌어안고 햇빛을 맞는 만수의 모습은 명백히 나무가 광합성을 하는 모습을 연상케 한다. 또, 만수는 해고에 관한 은어로 한국어로는 '모가지', 영어로는 '도끼질(ax)'이 있음을 말하며 회사에 항의한다. 또, 대화의 키워드를 손바닥에 적어놓는 만수의 습관도 그의 '나무다움'을 연상케 한다. 그는 영화 내내 동물적인 임기응변에 느리지만, 손바닥에 글씨를 써둔 것처럼 일단 정해진 목표에 대해 뚜벅뚜벅 뻗어나가는 인물로 그려진다. 마치 나무가 외부의 자극에 곧장 반응하지는 못하지만,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자라나며 바위를 뚫는 것처럼.
이러한 여러 정황에서 이 영화에서 사람은 나무로 은유되며, 나무는 사람으로 은유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전통적으로 사람은 공동체 혹은 세계 전체로서 비유되기도 했다. 동아시아 전통에서 자주 언급되는 '만물일체'(萬物一體)라는 말도 그렇고, 토머스 홉스의 유명한 저서 《리바이어던》의 표지는 개개인들이 모여서 절대군주의 몸을 이루는 삽화로 유명하다.
이렇듯 사람과 나무, 사람과 공동체가 호환적으로 비유된다면, 문 제지의 최선출(박희순 분)이 말하는 "종이를 만들 목적의 나무를 따로 심고, 그 나무들을 베어내고 다시 또 심고, 그 나무들로 종이를 만들고, 종이들은 재활용되어 다시 다른 종이가 된다"는 말은 자못 섬뜩하게 들린다. 이 대사는 구조적으로 잘 안정된 폭력과 착취, 특히 노동 착취를 연상케 한다. 마치 만수의 아버지가 2만 마리의 돼지를 키우고, 그 돼지를 잡아먹고, 똥을 누고, 그 똥으로 다시 돼지를 먹인 것처럼. 이 과정에서 돼지와 만수네 집안은 서로 '윈윈' 관계를 형성하지만, 실은 돼지에 대한 사람의 폭력과 착취는 구조적으로 고착화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만수나 범모 같은 노동자들은 제지회사 아래에서 안정적으로 생계를 꾸리며 '윈윈' 관계를 형성하지만, 이는 어떤 의미에서 자본주의 산업 시스템의 구조화된 착취일 수 있다. 이는 실은 마르크스가 일찍이 노동소외론에서 핵심적으로 주장한 것이기도 하다.
그나마 만수와 회사, 돼지와 만수네 집의 '윈윈' 관계가 이어지기만 하다면 좋으련만. 감독이 바라보는 세계는 착취조차도 안정적이지 못하다. 만수의 아버지는 역병으로 돼지 2만 마리를 생매장했으며, 영화는 만수의 "어쩔 수 없는" 해고로 시작된다. 사람(나무)을 갈아 넣어서 상품(종이)을 만드는 시대가 "어쩔 수 없이" 저물어가고 있다는 듯, 작품의 인물들은 하나둘 구닥다리 아날로그를 버리고 디지털 태블릿과 휴대폰을 사용한다. 산업 구조의 지각 변동과 함께, 혹은 역병이라는 뜻밖의 사건과 함께, 기왕의 '안정된' 구조는 허물어지고 "어쩔 수 없이" 기왕의 텃밭에 심어져 있던 사람(나무)들을 모조리 뿌리 뽑혀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의 엔딩롤에서 벌목 기계를 단 굴삭기가 무자비하게 나무를 베고 발가벗기고 있는 모습을 보면, 어딘가 나무들이 가엾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AI와 산업의 변화로 발가벗겨지고 있는, 발가벗겨질 수많은 사람들을 떠올리게 해서일까.
어쨌든 해고당한 만수는 마치 뿌리가 잘리고 태양빛을 잃어버린 나무처럼 천천히 시들어간다. 그가 선출을 처음 죽이려고 화분을 들어 올렸을 때 화분에서는 물이 뚝뚝 떨어져 그의 머리를 적셨지만, 뿌리와 햇빛이 없는 나무가 물을 좀 준다고 다시 자라날 리 만무하다. 마치 나무가 죽어가는 것처럼 세 건의 살인을 계획하고 실행하며 그는 천천히 도덕성을 버려가며 파멸의 길을 걷지만, 이는 한편으로는 이미 파멸해 있는 것이기도 하다. 나무는 뿌리를 자르는 순간 이미 죽어 있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얼핏 보기에 그가 맞이한 '해피 엔딩'은 파멸적인 결말이 확정되어 있는 것이기도 하며, 따라서 동시에 이미 파멸한 것이기도 하다. 그는 결국 빛과 바람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어두컴컴한 공장에서 의미도 목적도 없이 펄프롤을 방망이로 두드리다 시들고 말 것이다. 이 결말이 비틀린 웃음을 선사하는 이유는, 그가 나무이기 때문이다. 그는 즉각적으로 사태에 반응할 수 없는, 그러나 천천히 시드는 나무이기 때문에, 그 자신이 이미 파멸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하지만 《북두의 권》의 명대사처럼, "넌 이미 죽어있다"(お前まえはもう死しんでいる。)
악의 연대와 비밀을 감춘 나무
만수의 파멸 과정에서 흥미로운 점은 만수의 아버지와 만수의 의붓아들 시원과의 관계이다. 영화는 삼대에 걸친 악의 고리를 그려낸다. 아버지는 "먼저 쏘지 않으면 죽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베트콩을 죽이고 그의 총을 빼앗아 왔고, 만수는 "자리는 하나인데 사람은 넷이라" "어쩔 수 없이" 세 사람을 살해하고, 의붓아들 시원은 "엄마를 돕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친구 동호와 함께 동호네 대리점에서 휴대폰을 훔친다. 여기서 만수는 아버지의 유품인 총을 범행 도구로 삼는다는 점에서 아버지와 '악의 연대'를 체결하고, 시원의 다락방 안에 있던 담배를 미리 몰래 숨겨줌으로써 '악의 연대'를 제안한다. 그의 성공적인(?) 살인만큼 이 제안도 성공했을까.
시원이 훔친 휴대폰을 만수와 미리의 감독(?) 하에 땅에다 묻을 때까지만 해도 유지되는 것처럼 보였던 악의 연대는 만수가 고시조(최승원 분)의 시체를 처리하는 모습을 시원이 목격함으로써 균열이 생긴다. 시원이 만수의 친아들이 아니어서였을까? 만수가 술에 취해 친아들이 아닌 시원에게 폭력을 행사한 적이 있어서였을까? 시원은 만수의 죄에 눈감아주는 대신, 친어머니 미리에게 그 사실을 알리며 수면 아래에 있던 만수의 악을 끄집어낸다. 재미있는 점은 만수가 시초의 시체를 처리하면서 온실의 사방은 비닐로 가렸지만 천장만큼은 가리지 못했고, 그 결과 시원에게 발각된다는 점이다. 나무인 그가 그에게 자양분을 줘야 할 하늘의 눈을 가리지는 못한 것이다.
영화에서 제대로 묘사하지는 않지만, 나는 시원이 만수의 시체 처리 장면을 똑똑히 봤으며, 미리는 흙 속에 묻혀 있는 시조의 시체를 두 눈으로 봤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이 만수를 내치거나 떠나지 않는 것은 그러지 않고서는 "어쩔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이 목격한 시체를 사람의 시체라고 말해서는 이 가족을 유지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그들은 "돼지를 토막 내 묻었다"고 말로 자신을 속이고, 돼지 바베큐를 하자는 만수의 말에 화들짝 놀라며 손사래 친다. 그들에게 돼지는 시체를 의미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시원, 미리, 만수는 각자 그 나름의 방식으로 이전 세대와 악의 연대를 지속해 나간 것이다. 이들이 이렇게 되리라는 것은 사실 정해진 수순이다. 손수 악행을 저지른 만수와 시원은 둘째 치고, 미리도 자신에게 추파를 던지던 동호 아빠에게 노브라(?) 차림으로 유혹할 정도로 악의 연대에 익숙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훔친 휴대폰을, 범행 도구인 권총을, 범행의 결과인 시체를 나무 아래에 묻고 그 가족이라는 공동체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악의 연대에 동참한 것이다. 그러나 삼대의 죄악을, 엄청난 비밀을 감춘 나무는 여전히 그들의 앞마당에 심어져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나무는 사람으로, 사람은 공동체로 비유된다면, 이들의 가족 공동체는 죄악을 감추고 그 죄악을 양분 삼아 나무처럼 자라날 것이다. 마치 오늘날 한국의 공동체처럼, 우리는 우리 이전 세대의 죄악에 눈 감고 그 죄악을 양분 삼아 나무처럼 자라고 있다. 그래서 병들고 있는 걸까? 뿌리가 잘리고 햇빛을 잃은 만수처럼.
그와 우리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그렇다면 만수는, 이 가족은, 한국은 이제 어떻게 될 것인가. 그것은 만수가 살해한 세 사람을 보면 알 수 있다. 만수는 구범모, 고시조, 최선출 세 사람을 순서대로 살해하는데, 이 셋은 공통적으로 만수와 '닮아 있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내가 보기에, 이 셋은 각각 만수의 과거, 현재, 미래를 의미한다.
작품에서 그려지듯 구범모는 만수의 찬란했던 과거와 마찬가지로 '올해의 펄프맨' 상을 받았던 인물이며, 술독에 빠져서 제 몸조차 가누지 못하는 알코올 중독자이며, "우리가 아니면 누가 종이를 쓰느냐"며 아날로그에 천착하는 인물이다. 그는 하물며 이력서를 쓸 때조차 구닥다리 타자기를 쓴다. 만수가 살해 대상인 범모를 연민하게 되고, 범모가 했던 말을 반복하게 되는 것도 단순히 그를 '관찰'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에게서 자기 자신의 과거를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는 쉽사리 자신의 과거가 상처 입는 것을 보지 못하고, 그를 차마 제 손으로 죽이지도 못한다. 정작 범모를 죽인 것은 범모의 처 아라였다. 한국 사회로 비유하자면 범모는 조선이다. 한국 사회는 조선을 미워하면서도 차마 제 손으로 죽이지 못한다. 대신, 얼렁뚱땅 밀려 들어온 외부인이 조선을 죽여버린 것이다.
그런가 하면 고시조는 만수의 현재를 상징한다. 만수는 구두가게에서 일하는 시조에게서 실직 후 아르바이트를 전전했던 자기 자신을 겹쳐본다. 만수는 시조에게 딸 이야기로 연민을 사지만, 이 이야기는 단순히 연민을 위해 그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로 비참한 친아버지로서의 자신의 심정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일까. 그는 가장 간결하게 그를 죽이지만, 현재의 자신을 직시하지 못하겠다는 듯 그의 눈을 쳐다보지 못하며, 그의 시체를 토막 내지도 못한다. 그렇다면 시조의 시체는 어떻게 되었는가. 문자 그대로 나무의 "뿌리가 되어" 만수와 만수의 가족이라는 공동체를 키워나간다. 한국 사회로 비유하자면 시조는 이른바 "개발독재" 시기다. 경제개발이라는 미명 하에 한국은 별다른 숙고나 성찰 없이 "어쩔 수 없이" 단기간에 많은 폭력을 낳았고, 우리는 그 폭력을 풀어내지도 토막 내지도 못한 채 그냥 철사로 칭칭 감아서 한국 사회의 뿌리에다 던져 놓았다. 그것을 목격한 다음 세대와 동시대인은 여기에 연대하며 토양 위에 살아가야만 했다.
마지막으로 최선출은 만수의 미래다. 두 번째 피해자인 고시조가 비교적 점잖은 인물이었던 것과 대비되게, 최선출은 무례하고 거만한 인물이다. 선출은 고급 위스키를 마시고 시가를 피우며 부를 과시하지만, 그는 실은 외로운 알코올 중독자일 뿐이다. 선출이 만수가 바라던 바로 그 직장에 재직하고 있다는 점, 만수의 가정이 앞으로 화목하기란 요원하다는 점, 만수가 선출과 마찬가지로 '가족' 자체보다도 '집'에 집착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만수도 선출을 죽이고 나서 머지않아 무례하고 거만한, 그러나 외로운 알코올 중독자가 되리라는 것은 자명하다. 실로, 만수는 선출로 인하여 끊었던 술을 시원하게 들이켜면서 영화 내내 머리를 아프게 하던 충치를 뽑아버리고는, 선출을 죽여 급성 알코올 중독으로 사망한 것처럼 위장한다. 이것은 "자다가 토해서 죽을 뻔했었다"는 아내 미리의 언급과 같이, 만수의 최후도 선출과 다름없을 것임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감독은 한국도 이렇게 외롭고 쓸쓸하게 파멸할 것이라는 걸 말하고 싶은 걸까. 우리 공동체는 이미 망한 걸까. 영화는 여기에 어떤 답도 내놓지 않는다. 그저 방망이로 펄프롤을 두드리며 뚜벅뚜벅 걸어 나오는 만수를 끝으로 점점 어둠 속으로 잠겨 가는 공장을 보여줄 뿐이다. 코미디는 코미디로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