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껍데기를 벗어난

by 한그리 유경미 Feb 19. 2025

  오랜만에 산을 올랐다. 더운 여름이라는 핑계로, 바쁘다는 말로 둘러대다가 우리 집 앞산인 문학산을 마주했다. 봄은 봄대로, 여름은 여름대로, 각자의 멋이 있는 산이다. 뜨거운 햇살이 있어도 그늘 속 솔솔 불어오는 바람은 더위를 잊을 수 있다. 산을 타는 곳이 아닌, 산을 산책할 수 있는 곳이라는 게 더없이 좋다.

  중반쯤 올랐을 때, 예전에 만났던 달팽이를 생각한다. 집을 잃어버린 그는 우리 집 ‘달이’보다 오래전에 보았던 달팽이다. 걸음 보폭을 줄이고 수풀 사이를 살펴보아도 그는 없었다. 그게 벌써 언제였던가. 뜨거운 땡볕 길 가운데에 있었지만, 차마 그냥 두고 볼 수 없어 나뭇가지로 옮겨주었다. 껍데기가 없이 민달팽이였던 그는 자유로웠다. 집이 없어서였을까. 미끄러지는 느낌이 생기가 있었다. 별반 차이가 없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에서야 그를 자유로운 방랑자라고 명명한다.

  정상에 올라 하늘을 바라본다. 탁 트인 곳에서 올려다보는 하늘은 파란 바다 같다. 저 멀리 영종도로 가는 인천대교가 보인다. 서해바다는 황해라는 이름처럼 새파랗지 않다는 인식이 있는데, 오늘은 그렇지 않다. 하늘도 파랗고, 바다도 파랗다. 더운 날씨지만 전혀 축 늘어지지 않는다. 하늘과 바다를 보며 껍데기를 벗어던진 달팽이처럼 몸이 가벼움을 느낀다. 살랑 불어오는 바람에 내 마음도 붕 떠오른다.

  풀밭에서 머지 않은 곳에 달팽이가 보였다. 시멘트길에 달팽이 집이 멀리서도 보였다. 분명 달팽이였다. 껍질의 무늬만 봐도 집에 있는 녀석과 비슷한 종류의 달팽이였다. ‘달이 친구 해주면 좋아하겠네.’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스쳤다. 이렇게 높이 올라왔는데, 달팽이가 보이다니 의아하며 다가갔다. 뜨거운 태양으로 급한 마음에 껍데기를 손으로 잡았다.

  내가 쥔 조그만 힘에 달팽이집이 산산히 부서졌다. 껍데기 사이로 바닥이 보였다. 그의 몸뚱이는 이미 사라져버렸다. 바스락 소리에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 심장은 두근두근 밖으로 튀어나왔다. 얼굴을 들어 사방을 둘러보았다. 주변 사람들은 나에게 관심이 없었다. 들숨과 날숨으로 마음을 다 잡았다. 주변의 시선에 민감한 나는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허리를 펴고 일어나 다시 한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휴우, 큰 한숨으로 연기처럼 사라진 달팽이를 위로했다.

  돌보고 있는 달팽이가 있어서였을까. 산에서 본 달팽이 껍데기를 보고 큰 충격이었다. 예전에 아이들이 어린이집에서 받아온 달팽이를 죄의식 없이 버렸을 때는 아무런 마음의 변화가 없었다. ‘우리 집에 와서 불쌍하지만 어쩔 수 없다.’가 전부였다. 모든 생명은 귀하지만 무서운 번식력을 가지는 달팽이가 집에서 수백 개의 알을 낳으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이 앞섰다. 아이들의 관심이 사그라들 때쯤 아파트 풀숲에 버렸다. 그렇게 하는 것이 그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존재를 아무도 알지 못하는 곳으로 사라져버린 그는 진정 자유로울까.

  어쩌면 지금 작은 통 안에 있는 달이가 더 슬플지 모른다. 먼저 자유로워진 그의 몸과 마음이 어느새 내 마음에 닿아 노크하고 있다. "그렇게 잡아 가두고 뭘 하는 것인가, 너는 나를 구했다고 하지만 정녕 내가 너를 구한 것이 아닌가." 그럴 수 있다. 네가 있음으로 인해 나는 혼자가 아님을 깨달았다. 내가 너를 떠내려가는 물에서 들어 올려서 살려주기는 했으나 그는 온전히 스스로 버티고 있다. 내가 조물주가 되어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는다고 해도 그는 알아서 움직이리라.

  껍데기가 중요치 않다. 뜨거운 태양 아래에 부서질 수밖에 없는 가난한 달팽이로서는 집 하나 지켜내기 쉽지 않다. 제 몸이 이내 사라져버리는 하얀 여름날, 달이도 어쩌면 그날을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주인이 챙겨주지 않는 상황이 될 때 집 안에 꼭 틀어박힌 채로 아무 기척도 없는 날이 아마도 그 시간 속을 산책하고 있으리라. 내가 용납지 않아 다시 그를 억지로 깨워 일으키고 다시 억지로 살도록 하는 것은 아닐까.

  살아야 한다. 집도 없고, 돈도 없고, 일이 없을 때조차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야 한다. 달팽이처럼 기약 없는 쳇바퀴 돌 듯 조그만 통 안에서 살고 있더라도 지금의 나로서는 그게 최선이다.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한다. 억지로라도 너를 꺼내어 다시 일어날 수 있도록, 기어갈 수 있도록 얼굴 맞춤을 하리라. 우리는 그렇게 살아야 한다. 그래서 달이 너도 그렇게 깨우고 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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