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은 202호, 옆집인 201호에는 할머니 한 분이 사신다. 희끗한 파마머리에 펄럭이는 몸뻬 바지, 지팡이를 짚고 절룩거리시는 이 할머니는 젊은 애 엄마들만 가득한 우리 아파트에서 언제나 눈에 띈다.
할머니는 올해 80세, 몇 년 전까지는 웬만한 젊은 사람보다 목소리가 우렁찬 할아버지와 함께 사셨다. (할아버지는 지병인 폐암이 재발하여 돌아가셨다 한다) 할아버지의 그 힘찬 목소리 덕에 난 우리 집에서도 옆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대충 감을 잡을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할머니 집은 항상 조용하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마주치는 할머니 모습은 늘 비슷하다. 등에 커다란 배낭을 메고 한 손에는 지팡이를 짚고 계신데, 가끔은 지팡이 챙기시는 걸 잊으시는지 '아차' 하며 집에 다시 들어가기도 하신다. 배낭이 딱 달라붙어 있는 할머니 등은 이미 기울어질 대로 기울어져 있다.저러다 90도의 직각 허리를 가지시게 될까 봐 볼 때마다 불안하다. 불안한 건 허리만이 아니다. 신경통으로 고생하신다는 다리를 볼 때도, 말할 때마다 나오는 거친 숨소리를 들을 때도 마음이 영 편치 않다.
"할머니, 오늘은 어디 가세요?
허리랑 다리는 불편하지 않으세요?" 하고 물으면
"집에 있으면 더 아파, 밖에 나가야 돼" 그러신다.
할머니에겐 오랜 취미가 있다. 바로 딱지치기다. 할아버지도 안 계신데 혼자 딱지치냐고? 아니, 딱지치기 상대는 바로 우리 아들이다. 할머니는 느지막한 오후, 아이가 학교 마치고 집에 올 시간이 되면 우리 집으로 오신다. 그러고는 채 가방을 내려놓지도 않은 아이를 재촉하며 '오늘도 딱지 한 판 붙자' 그러신다. 평소엔 계란 한 판도 들기 힘드시다는데 딱지 칠 땐 어디서 나오는지 힘이 장사다. 게다가 승부욕 또한 장난이 아니시다. 딱지치기 승리의 깃발이 아이 쪽으로 넘어간 날에는 할머니는 두 팔을 걷어붙이시고 '내일은 내가 꼭 이길 테다' 하신다.
할머니는 우리 아들과 굉장히 친하다. 둘이서 뭐가 그리 재밌는지 '하하 호호' 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할머니의 '라떼는~' 은 아이에게 신선한 이야기책이며, 아이의 시끄러운 수다는 외로운 할머니에게 삶의 위안이다. 둘이 함께 있는 걸 보면 어쩜 저리도 쿵짝이 잘 맞을까 싶은 것이 절친도 이런 절친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