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집 할머니는 우리 엄마
그날은 1월, 내 생일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몸이 좋지 않던 그 시절의 난 생일이라고 해야 특별할 것 없이, 그저 아직 어린아이와 함께 집에서 하릴없이 시간만 보내고 있었다. 내 안의 무기력과 우울은 당연한 듯 일상 속에 자리 잡아 나를 야금야금 파먹었고, 밖에서 부는 찬 겨울바람마저 새로운 삶을 향해 나아가려는 어떤 시도조차 못하게 막는 듯했다.
그때 아빠에게서 전화가 왔다.
별로 친밀감이 없는 부녀 사이라 내 생일을 기억하고 전화하셨을 리는 없는데 무슨 일이지 하고 생각한 것도 잠시, 아빠는 전화로 폭탄 선물을 날리셨다.
"나 암에 걸렸단다. 폐암 3기쯤 되나 봐"
"네? 암이라고요?"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암 그것도 예후가 좋지 않은 폐암이라니 이제 어떡하나. 하지만 아빠가 내게 전화한 이유는 암 선고받은 것을 알리려는 게 아닌 다른 데 있었다.
" 내 말이다. 니가 사는 동네로 이사 가야겠다. 집 나온 거 있는지 알아봐라"
그 당시 친정 부모님은 부산 금정구에 있는, 재개발을 앞둔 동네의 한 오래된 주택에 세 들어 살고 있었다. 그 집은 이모집이었는데 이모가 세를 받기 위해 1층을 작은 셋집 3개로 쪼개어 만든 매우 갑갑한 곳이었다. 평생농사 지으면서 시골 널찍한 집에서 살던 부모님이 그리 좁고 통풍도 안 되는 곳으로 간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고향 시골마을이 국가공업단지에 수용되면서 마을을 떠나야 했기 때문이다. 새로 분양받은 땅에 집을 지으려고 기다리는 동안 계실 곳이 필요했고, 잘 모르는 곳에 전세로 들어갔다가 돈 떼어 먹힐까 우려한 아빠의 불안감이 그 좁고 불편한 곳으로 들어가게 만든 것이다.
난 그 집이 너무 싫었다. 우리 집에서 거기에 가려면 택시를 타도 한 시간이나 걸렸다. 그 좁고 어두운 집에 들어가면 몸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불편해졌다. 아빠는 한쪽방을 차지하고 줄곧 담배만 피웠는데 그 탓에 방 안 가구들과 벽에는 거뭇하게 담배 진이 눌어붙어 눅진거렸다. 1층이라 방범용으로 설치해 놓은 창살은 보기만 해도 감옥을 연상시켜 숨이 막혔다. 또한 평소 건강하던 엄마가 그 집에서 산 이후 혈압이 치솟아 약까지 복용하시는 것을 보고는 불안감이 들어 하루빨리 그 집에서 나왔으면 싶었다. 하지만 엄마, 아빠는 아무리 다른 동네로 이사 가라고 해도, 아니면 분양받은 땅을 팔고 아파트로 가라고 해도 조금만 참으면 된다며 그 집에서 꿈쩍을 안 하셨다. 결국 암에 걸리고 나서야 마음이 움직인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 우리 동네일까? 언니는 멀리 경기도에 살고 있으니 어쩔 수 없다 쳐도 오빠가 부산에 살고 있는데 왜 평소 살갑지도 않은 나를 택하신 것일까?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대학을 무조건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야지 마음먹었다. 가난한 집도 싫고 부모님이 매일 싸우시는 것도 지긋지긋했던 나는 어떻게든 집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하지만 그 당시 미처 몰랐던 것이 있는데 집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큰 만큼 집을 떠나기 두려워하는 마음 또한 컸다는 것이다. 막상 대입 시험을 치르고 다른 지역에 있는 대학에 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난 집에서 통학할 수 있는 지역 내 대학을 선택했고, 그렇게 대학과 직장을 집에서 다니면서 20대를 보냈다.
진짜 집을 벗어난 건 결혼을 하고 나서였다. 남들보다 조금 일찍, 언니 오빠 다 제치고 결혼을 한 나는 결혼과 동시에 완벽한 자유를 누리기 시작했다. 아빠 때문에 원하지 않는 학과를 졸업하고 적성에 맞지 않는 직장을 다니느라 힘들었던 나는 시원하게 직장을 그만뒀고, 부모님 간섭 없이 하고 싶은 일들을 편하게 결정했다. 부모님에 관해서는, 결혼 안 한 언니 오빠가 같이 살고 있으니 별 걱정이 되지 않았다. 친정집은 가끔 안부차 들르기만 하면 되는 곳으로 변했다.
부모님이 신경 쓰이기 시작한 건 몇 년 후 언니 오빠가 차례로 결혼하고 두 분만 시골집에 계실 때부터였다. 부모님을 잘 챙기던 언니가 멀리 경기도로 가 버리자 부모님 걱정이 내 차지가 되는 것 같았다. 두 분이서 밥은 잘 챙겨드시는지, 매일 퉁탕거리며 싸우고 계신 건 아닌지 맘이 쓰이는 건 자식으로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부모님이 이모집 1층에 전세를 살기 시작하면서부터는 걱정이 도를 넘기 시작했다. 그 당시 나는 아파서 거의 집에서 누워만 지냈기 때문에 친정집에 자주 갈 수가 없었다. 마음먹고 찾아 간 날은 비좁은 곳에서 불편하게 사시는 두 분 모습에 찝찝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와야 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부모님이 근처에 사시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그 마음은 기도로 변했다.
"하나님, 부모님이 우리 동네에서 살게 해 주세요."
하나님께서 정말 기도를 들어주신 걸까?
아빠가 암에 걸렸다며 우리 아파트로 이사 오겠다 하시는 전화를 받았을 때 먼저 든 생각은 기도가 이루어졌구나였다. 전화를 끊자마자 몸이 아픈 것도 잊고 벌떡 일어나 아파트 길 건너에 있는 부동산으로 향했다.
"바로 옆집이 매물로 나와있네요"
"네? 정말요?"
믿을 수가 없었다. 엘리베이터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바로 옆집에서 집을 팔려고 내놓은 것이다. 그저 같은 동네이기만 해도 좋을 거라 생각했는데 가장 가까운 곳으로 오시게 되다니 기도가 이렇게 세밀하게 이루어지는구나 하는 기쁨이 먼저 솟았다. 하지만 마냥 기쁠 수만은 없지 않은가. 암이라는 혹을 달고 옆집으로 오시는 부모님인데... 이후 복잡 미묘한 내 감정과는 달리 아빠의 암수술과 이사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고, 같이 사는 듯 따로 사는 서로 간의 옆집 살이가 시작되었다.
혹시 암수술한 아빠의 상태가 궁금하신 분이 있을까 해서 말인데, 아빠는 폐암 3기 판정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옆집에서 10년을 더 사셨다. 이사오 실 때 "내 딱 10년만 더 살고 싶다. 그러니까 느그들 10년 안에는 다른 곳으로 이사 가지 말라'" 하던 그 말처럼 말이다.
돌이켜보면 참 신기한 것이 누구보다도 부모님과 멀리 떨어져 살고 싶었는데, 누구보다도 부모님 가까이 살게 되었다. 옆에 살면서 많은 것을 누렸고 많은 것을 책임졌다. 친정집이 옆집이라 하면 어떤 이는 좋겠다며 부러워하고 또 어떤 이는 부담스러울 것 같다고 우려한다. 둘 다 맞는 말이다. 좋기도 하면서 마냥 좋을 수밖에 없는 옆집 살이. 그게 나에게 주어진 선물이자 감당해야 하는 몫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