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2시, 핸드폰 벨 소리가 울린다. 오늘도 역시나 하며 시큰둥하게 핸드폰을 집어 든다. 누군지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다. 언니가 오전만 일하는 직장에서 퇴근하면서 전화하는 것이다.
"엄마, 너희 집에 있어?"
"아니, 없는데"
"그럼 엄마 어디 갔어? 집에 전화해도 없고 핸드폰도 안 받아."
언니한테서만 전화가 오는 게 아니다. 심심찮게 오는 오빠 전화 또한 모두 엄마를 찾는 전화이다. 일단 집으로 전화했다가 받지 않으면 핸드폰으로 하는데, 핸드폰은 또 잘 안 받으니 답답해서 옆집 사는 나에게 전화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시간에 우리 집에 와 있을 리는 없고...
"나도 몰라, 나한테 말 안 하고 나갔어 “
어디 가면 간다 미리 말하고 나가면 좋으련만 옆집 사는 이 할머니는 오늘도 말없이 슬그머니 나가셨다.
도대체 어딜 그렇게 가시는 걸까???
등에 커다란 배낭을 딱 붙여 매고 지팡이를 짚고 (가끔은 화장까지 하고) 우리 엄마가 매일같이 가는 곳은 마을 경로당도 아니요, 신경통, 고혈압, 고지혈증의 병원 순례도 아닌, 산 넘고 물 건너 고개 넘어서만큼이나 멀리 있는 조그마한 밭이다. 우리는 이 밭을 할매밭이라 부른다.
할매밭에 가는 길은 매우 험난하다. 부산 서쪽 끝자락의 한 시골 동네에 있는 이곳에 가려면 일단 버스를 2번이나 갈아타야 한다. 세 번째 타야 하는 버스는 마을버스인데 잘 안 오기로 악명이 높다. 이전에 엄마 따라 밭에 간 적이 있는데 버스 기다리는 시간까지 합쳐 왕복 3시간이나 걸렸다. 그 뒤론 엄마가 밭에 가자고 꼬셔도 잘 안 간다. 하지만 긴 이동 시간에도 불구하고 엄마가 이 밭을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바로 농사 본능 때문이다. 평생을 농사만 짓고 사신 엄마, 살던 시골 마을이 국가 공업단지로 수용되면서 집도 땅도 사라져 10여 년 전 우리 옆집으로 이사 오셨다. 그런데 도시 아파트는 갑갑한지 자꾸 흙으로, 땅으로 가시는 것이다.
"엄마, 제발 농사 그만 지어.
맨날 허리도 아프고, 다리도 아프다 하면서 힘들지도 않나, 좀 편하게 살아. “
여든이나 잡수신 할머니가 버스를 타고 매일 밭에 가는 걸 보면 걱정이 안 될 수가 없다. 허리도 안 좋고, 무릎도 안 좋아서 수술을 하니 마니 하는 상황에서 그런 노동의 현장으로 달려가는 것을 좋아할 자식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엄마 대답은 늘 같다.
" 내 올해만 딱 농사짓고 내년부터는 안 지을게. “
처음에는 그 말을 믿었다. 이미 심어놓은 작물들이 있으니 겨울 지나고 봄부터는 농사 안 짓겠다는 그 말을. 그러나 한 해 두 해 지나면서 알았다. 엄마는 몸을 움직일 수 있는 한 농사짓는 것을 멈추지 못하실 분이란 걸 말이다. 실제로 집에만 있으면 우울해 보이는 엄마가 밭에 다녀온 날은 활력이 가득한 걸 보면 엄마에겐 흙이 보약인가 싶기도 하다.
이제 엄마가 그리 애지중지하는 밭으로 한 번 가보자. 할매밭에 한 번이라도 가 본 사람은 눈이 휘둥그레진다. 멀리서 바라볼 땐 조그맣고 볼품없어 보여 저기에 뭘 심겠나 싶은 밭에 온갖 농작물이 자라고 있기 때문이다. 상추, 파, 고추, 배추, 열무, 오이, 가지, 부추, 옥수수, 감자, 고구마...... 시장에서 볼 수 있는 채소란 채소는 다 모여 있는 듯하다. 계절 따라 끊임없이 심고 수확하는 엄마 덕에 이 밭은 온갖 채소가 솟아나는 화수분 같다.
밭에서 일을 하고 집으로 돌아올 때 엄마는 가지고 간 배낭에 수확한 농작물을 가득 담아 오신다. 허리도 기울어지고 무거운 물건은 잘 들지도 못하는데 배낭을 어떻게 메고 오는지 늘 의문이다. 엄마 말로는 드는 건 못해도 어깨에 지는 건 가능하단다.(나는 이해 안 되지만) 옥수수나 고구마같이 한꺼번에 많은 양을 수확해야 하는 날은 차가 필요한데 이때는 친정 오빠가 동원된다. 오빠 쉬는 날에 한꺼번에 수확해서 한 차 가득 싣고 오는 것이다. 여기서 옆집에 사는 우린 뭐 하고 오빠를 부르냐 싶겠지만 우리 가족은 차가 없다. 평소 차의 필요성을 그다지 못 느끼고 살아서 소유 또한 하지 않지만 이럴 땐 정말 차가 있었으면 싶기도 하다.
이렇게 엄마가 힘들게 지으신 농작물은 대부분 옆집 사는 우리 집 식탁에 오른다. 수확량이 많을 때는 잘 손질해서 멀리 경기도에 사는 언니에게 부치고, 오빠가 들를 때 손에 쥐여 주시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수확물을 다 소화시키는 건 우리 가족이다. 우리 집 냉장고에는 봉지 봉지의 채소들이 한가득 들어있다. 하지만 우리가 먹는 속도보다 엄마가 주시는 속도가 훨씬 빠르다. 가령 지금과 같은 봄에는 상추가 넘쳐난다. 뜯어내도 뜯어내도 계속 자라나는 엄마의 봄 상추 덕에 우리 집 식탁엔 상추가 마를 날이 없다. 어쩌다 냉장고 정리를 하는 날에는 구석에 박혀 있던 상추가 비닐봉지째 상해 곤죽이 되어 발견되기도 한다. 상추 이야기를 조금 더 해 보자면 엄마가 상추를 주실 때 늘 하는 말이 있다. 이거 먹으면 잠이 잘 오니 많이 먹으라고. (실제 상추에 수면 유도 성분이 있다고 한다.) 요즘 같은 봄에는 낮이나 밤이나 가리지 않고 졸음이 쏟아지는 걸 보면 상추 때문인 것 같기도 한 것이, 어쨌든 주위에 불면증을 호소하는 친구들이 많은데 이렇게 잘 자는 것도 상추덕, 아니 엄마 덕인가 보다.
올해는 봄 향기 가득한 냉잇국도 원 없이 끓여 먹었다. 좀 있으면 엄마가 뜯어다 얼려놓은 쑥을 가지고 쑥떡도 만들어 먹을 예정이다. 도시 사람들이 마트에서 온실 속 채소를 사 먹는 동안 난 엄마가 밭에서 햇빛과 바람으로 키운 정성 가득한 채소들을 먹는다. 먹을 때마다 당연하다 생각했었는데 새삼 엄마의 수고가 느껴진다. 평소 고맙다는 표현을 제대로 못하며 사는데 이번에는 감사의 말을 입 밖으로 꼭 내봐야겠다. 요즘 들어 부쩍 몸이 안 좋아 보이는 엄마! 언제까지 밭에 갈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엄마가 좋아하는 이 일을 오래 할 수 있으면 좋겠다. 나도 밭이 멀다고, 혹은 귀찮다고 내빼지 말고 엄마랑 같이 가서 일 좀 도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