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가 그러고도 사람이가?”
“이래가 우째 사노, 날 말라 직일라카나”
우렁찬 고함소리가 담을 넘는다. 나이에 비해 기운이 철철 넘치는 옆집 할아버지 목소리다.
“또 시작이구나”
이런 싸움이 한두 번 있는 것도 아니어서 이제는 그러려니 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저러다 말겠지. 신경 끄자'라고 중얼거리며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 해 본다. 하지만 이미 귀는 마음속의 긴장감을 알아차린 듯 옆집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하나도 빠짐없이 듣고 있다.
연이어 할아버지의 짜증이 섞인 말들이 노랫말 후렴구처럼 반복된다. 할아버지의 일방적인 목소리에 오늘도 할머니는 찍소리도 못하고 패하는가 싶다. 그 순간 할머니의 소심한 반격이 시작된다.
“그게 아니고... 내... 그...”
하지만 할머니 입을 통해 나오는 자음과 모음은 미처 문장이 되기도 전에 다시 할아버지 목소리에 묻힌다. 간간이 악에 받친 울부짖음만이 할머니가 싸움 전선에서 완전히 후퇴하지 않았음을 알려줄 뿐이다. 누가 들어봐도 한쪽으로 기우는 싸움. 할머니가 아무리 목소리를 끌어모아 ‘빽’ 하고 질러대도 이미 승부는 결정 났다. 할아버지 승.
이쯤 되면 나는 자동으로 우리 집 현관 쪽을 바라본다. 조금 있으면 할머니는 우리 집으로 오실 것이다. 그러고는 이러실 테지. “저 인간 땜에 못 살겠다. 가슴이 답답해서 숨이 안 쉬어진데이. 하루 이틀도 아니고... 아이고, 원수도 저런 원수가 없다.”
옆집 싸움의 양상은 늘 비슷하다. 일단 예사로운 할머니 행동 무언가가 예민한 할아버지의 신경을 거스른다. (할아버지는 몇십 년째 신경과 약을 복용 중이시다) 그러면 절대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는 할아버지는 할머니를 앞에 앉혀놓고 했던 얘기를 무한 반복하면서 윽박지르기 시작한다. 문제는 그게 좀처럼 끝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짜증과 고함과 협박이 섞인 그 소리를 처음엔 참으며 듣고 있던 할머니도 영 억울하다 싶으면 중간중간 소심한 목소리를 내어 보기도 한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할아버지의 화만 더 돋우게 할 뿐! 결국 할아버지의 일장 연설이 끝이 날 때까지 견디는 게 싸움을 제일 빨리 끝내는 방법이란 걸 일찌감치 터득한 할머니다. 그렇게 상황이 종료되었다 싶으면 할머니는 분노를 가득 안고 우리 집으로 달려와 속풀이를 하시는 것이다.
“이제 그만 싸울 때도 되었지 않아요? 두 분 다 지금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그렇게 이팔청춘처럼 싸우냐고요? 한평생 싸움만 하고 사는 거 지겨울 법도 한데...”
늘 지기만 하는 할머니를 보면 안쓰럽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하다. 할머니 마음을 달랠 위로의 말을 하고 싶지만 한두 번도 아닌 싸움을 지켜보는 나로서는 한숨이 먼저 내뱉어진다.
“내가 싸우고 싶어서 싸우나? 가만히 있는데 자꾸 시비를 걸고 못살게 한다아이가. 어이구, 내 팔자야......”
할머니의 한 맺힌 말을 듣다 보면 꾹꾹 눌러가며 참고 산 세월을 가늠하기조차 힘들어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그냥 벌겋게 달아오른 할머니의 분이 풀릴 때까지 조용히 기다려 줄 수밖에.
이 노부부는 10여 년쯤 전에 우리 옆집으로 이사 오셨다. 그러니까 우리 가족은 10여 년동안 이 싸움을 지켜본 셈이다. 덧붙여서 우리 가족 중에서도 나는 40년이 넘는 세월을 이 부부 싸움의 관중이자 목격자로 살아왔다. 이 노부부는 내 친정 부모님이시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우리 집은 싸움이 잦아들 날이 없었다. 예민한 아빠와 무신경한 엄마. 두 분은 마치 싸우기 위해 결혼한 것처럼 최선을 다해 싸웠다. 그러고는 다음 날이 되면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으로 돌아갔다. 싸움이 마치 삶의 일부인 양 자연스러웠던 두 사람! 하지만 불안에 떨며 지켜보던 자식 생각도 좀 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엄마 아빠가 싸우지 않게 해 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하던 어린 나는 성인이 되어 어떻게든 집을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마침내 결혼과 동시에 해방감을 누리기 시작했지만 그것도 잠시, 친정 부모님은 우리 가족이 사는 바로 옆집으로 이사 왔다. 그 지긋지긋한 싸움을 계속 보게 된 것이다. 어쩜 이렇게도 안 맞는 두 사람이 만나 평생을 사셨을까. 생각해 보면 의문투성이다. 그러면서도 끝까지 맞춰 사신 걸 보면 인생은 내가 모르는 역설로 가득 차 있는 게 분명하다.
이제 옆집 할아버지의 기운이 넘치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매일 엄마 때문에 말라죽겠다고 고함치던 아빠는 (말라죽은 게 아니라) 폐암 말기에 호흡 곤란 증세로 돌아가셨다. 그러면 허구한 날 아빠 때문에 ‘내 팔자야’ 하고 팔자 타령하던 엄마는 아빠가 돌아가신 뒤 팔자가 폈을까? 그것 또한 아닌 것 같다. 이제 엄마는 아빠가 아닌 외로움과 싸우시는 것 같기 때문이다. 불이 꺼진 채 TV 소리만 조용히 흘러나오는 옆집을 보며 아빠의 빈자리를 느낀다. 가끔은 그 고함소리가 그립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