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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바위 Jun 22. 2023

감자는 울 엄마가 최고지


'띠리리리' 알람이 울린다.

아침 운동하러 나갈 시간이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 걸으며 하루를 시작하지만 오늘은 이상하게 일어나기 싫다. 하루쯤은 쉬어도 괜찮겠지 하며 다시 잠으로 빠져드는데 또 '삐삐삐삐' 소리가 난다.

'이번엔 뭐지? 알람은 아닌데.' 하는 순간 현관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옆집 사시는 친정엄마다.


'꼭두새벽부터 또 무슨 일이시지?' 생각하면서도 일어나기 싫어 아무런 기척하지 않고 있었더니 엄마는 곧장 아이 방으로 들어가신다.

“OO야, 일어나 봐라. 할매가 감자 삶아 왔다."

자는 아이를 깨우는 소리가 들린다.

"어서 한 입 먹어봐라, 지금 먹어야 맛있다."

아이가 일어나지 않는지 엄마는 재차 아이를 깨우신다.

이 새벽에 급한 일도 아니고 그저 손주에게 감자를 먹이러 오신 거라니... 순간 짜증이 치밀어 거실로 나가 엄마에게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엄마. 지금이 몇 신데 애를 깨우노? 그리고 일어나자마자 감자가 들어가나?"

"감자를 삶았는데 식기 전에 묵으라고 그런 거 아이가."

"엄마. 감자가 소화 잘 되는 음식도 아니고 지금 먹어서 우짜라고? 먹고 나면 또 잘 수도 없고, 어젯밤에 늦게 잔 아이를 벌써 깨워서 우짜겠다는 말이고."


연이어 뾰족한 말들이 내 입에서 나오고, 자고 있던 남편까지 거실로 나오자 엄마는 무안하셨던지 감자를 내려두고 슬그머니 나가셨다.


한바탕 소동에 아이까지 일어나 버렸다. 더 자라고 해도 완전히 깨버렸는지 잘 생각이 없어 보인다. 이 상황이 속상하기도 하고 아침부터 엄마에게 쏘아붙인 것이 신경쓰이기도 하고 이래저래 마음을 불편할 때 엄마가 놓고 간 감자가 눈에 들어왔다. 이왕 모두 깨버린 거 아침 대신 엄마가 삶아오신 감자나 먹자 하며 감자를 집었는데 따뜻할 줄 알았던 감자가 거의 다 식어 있다.

‘이상하다 아까 분명히 따뜻할 때 먹으라고 가져오신 걸 텐데...’

식은 감자를 한 입 베어 물다 보니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이해가 간다.




어제 동네 슈퍼에서 알이 굵은 햇감자를 싸게 팔길래 두 상자를 샀다. 그리고 ‘이걸로 감자 삶아 먹으면 맛있겠네’ 하면서 엄마에게 한 상자를 건넸었다. 새벽잠이 없으신 엄마는 어제의 내 말에 새벽부터 감자를 삶으신 거다. 따끈따끈한 감자를 손주에게 먹이고 싶은데 너무 이른 시간이라 곧장 오시지는 못하시고 점점 식어가는 감자와 밝아오는 새벽 사이를 조율하시다 더는 못 기다려서 오신 것일 테다.


엄마의 심정이 느껴지자 좀 전에 화를 내서 불편했던 마음이 더 불편해졌다. 왜 유독 엄마에게만 속에 있는 감정들이 다 쏟아져 나오는지 모르겠다. 엄마가 옆집에 사신 지도 10년, 팔순이 다 되신 엄마가 살아오신 삶을 생각하면 늘 미안한 마음과 잘 해드려야지 하는 마음을 먹지만 가까이 살면서 매일 부딪히다 보니 나도 모르게 짜증을 낼 때가 많다.


남편과 아이들이 다 출근하고 등교하고 나서도 찜찜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계속 시간은 지나가고 더는 그 불편함을 들고 있기 싫어 옆집으로 갔다. 엄마는 거실 바닥에 앉아 TV를 보고 계셨다.

‘무슨 말로 이 어색한 분위기를 풀어야 하나, 그냥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대할까?’

내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면 아마 엄마도 그러실 거다. 늘 그래왔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용기를 내어 한마디를 꺼냈다.

“엄마, 아까는 화내서 미안했어...... 그리고 그 감자 진짜 맛있더라.”

이 말에 엄마와 나 사이의 어색했던 기류가 조금 풀리는 느낌이 들어 연이어 몇 마디를 덧붙였다.

“나중에 우리 집에 와서 감자 좀 삶아도. 애들도 먹이고 나도 감자 삶는 법 좀 배우게. 난 아무리 삶아도 그 맛이 안 나더라.”




오후에 아이가 하교하자마자 엄마가 오셨다.

엄마가 시키는 대로 감자 껍질을 깐 뒤 큰 냄비에 담고 물을 부어 가스불에 앉혔다.


“감자를 앉히고 한김이 오르면 물을 다 따라버리고 남은 감자를 까불러야 한다, 그래야 타박타박 맛있게 된다. 그리고 다시 소금물을 만들어서 붓고......”


감자가 익어가는 동안 엄마는 엄마만의 감자 삶는 비법을 알려주신다. 그리고 젊은 시절에 동네에서 감자 잘 삶기로 유명하셨다며 그 시절 이야기를 풀어 놓으신다. 아이와 함께 엄마의 옛이야기를 재미있게 듣다 보니 어느덧 엄마표 감자가 완성되었다. 뚜껑을 열자 김이 달아나며 맛있는 냄새가 솔솔 풍긴다.

“감자는 따뜻할 때 먹어야 맛있다. 식기 전에 어서 먹자.”

뜨거운 감자를 후후 베어 먹으니 입안에서 사르르 녹는다.


'그래, 이 맛이야. 감자는 울 엄마가 최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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