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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바위 Oct 26. 2024

엄마의 해방일지

아빠가 돌아가셨다. 딱 10년만 더 살고 싶다던 그 바람대로 폐암 진단을 받으신 후 10년째 되던 해에 병이 재발하여 돌아가신 것이다. 병의 재발은 꽤나 갑작스러웠다. 처음 폐암 3기 진단을 받고, 수술과 항암치료를 받을 때 (내가 보기에) 아빠는 별 어려움 없이 그 과정을 잘 견디셨고, 그 뒤 5년 동안의 정기 검사에도 별다른 이상이 없었다. 평소 병원 가기를 싫어하시던 아빠는 더 이상은 건강검진을 받지 않겠다 하셨고, 이후 아빠가 암 환자였다는 사실은 가족 모두에게서 자연스럽게 잊혔다. 10년이나 지난 뒤 이렇게 재발이라는 역습을 당할 거라곤 모두가 예상 못 한 일이었다.

그 당시 아빠가 두려워한 것 또한 암이 아니라 2020년 전 세계를 꼼짝 못 하게 한 코로나였다. 평소 걱정 제조기라 할 만큼 불안 증세가 심했던 아빠는 연일 tv를 통해 보도되는 코로나 소식에 좌불안석이셨고, 이에 집 밖으로는 한 발짝도 나가지 않으셨다. 그뿐이 아니었다. 서로 조심해야 한다며 옆집에 사는 우리 가족조차 출입을 못 하게 하셨다. 그러다 보니 바로 눈앞에 부모님이 계시는데도 전화로 안부를 묻고, 음식이나 생필품 같은 것은 문밖에 두고 오는 이상한 풍경이 한동안 벌어지기도 했다. 그 상황에서 제일 힘들었던 사람은 엄마가 아니었을까. 평소 아빠로부터 듣는 짜증과 잔소리를 우리 집 또는 바깥세상에 털어버리야 속이 풀리던 엄마가 갇힌 공간에서 아빠와 둘이서만 지내야 했으니 얼마나 갑갑하셨을까.


그때 아빠가 감기에 걸렸다. 혹시 코로나일까 싶어 아빠는 전전긍긍하셨지만 집 밖으로 전혀 나가지 않을 때라 그럴 리는 없었다. 평소 환절기면 감기를 앓곤 해서 그러다 괜찮아지겠지 하며 기다렸는데 감기 증세는 점점 심해졌다. 그러다 겨우 회복되나 싶어 안도의 한숨을 내쉴 즈음 아빠는 숨이 잘 안 쉬어진다며 또 다른 증세를 말했다. 아빠는 병원에 가는 것을 무척이나 싫어하셨다. 숨이 차는 증세가 있을 땐 병원을 가봐야겠다고 하다가도 괜찮은 날은 멀쩡하다면서 안 가겠다고 하셨다. 그렇게 미루고 미루다 병원에 갔는데... 이미 늦었다고 했다. 언제부터 퍼져 있었던 건지 암덩어리가 심장을 압박하고, 혈관을 거의 다 막고 있었던 것이다. 아빠의 입원 기간은 그리 오래지 않았다. 집중 치료실에 일주일 정도 입원한 뒤 일반 병실로 옮겨 방사선 치료를 받았고, 암 크기가 줄어다는 의사의 소식과 함께 퇴원 후 항암 치료가 진행되었다. 평소 정정해 보이고 기운이 넘치던 아빠였지만 여든이라는 나이에 항암 치료는 무리였을까. 방사선 치료 때까지만 해도 몸이 아무렇지도 않다며 괜찮다고 했는데 항암 치료의 횟수가 더해질 때마다 급격히 체력이 떨어지는 게 눈에 보였다. 그러더니 급기야 호흡곤란이 와서 응급실에 실려가고, 다시 입원한 지 일주일여 만에 아빠는 폐렴으로 돌아가셨다. 아빠의 죽음의 과정은 참 짧았다. 누구는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도 있는데 (가족들 고생 안 시키게) 오래 끌지 않고 고맙게 갔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실제로 아빠는 자식들에게 '병의 짐'만큼은 절대 지우지 않으려는 듯했다. 우리 앞에서는 앓는 소리 한번 내지 않으셨고, 마지막 입원 일주일 동안도 대부분의 시간을 병상에 꽃꽂이 앉아서 고통을 참으셨다. (숨이 안 쉬어지는 고통, 그 고통이 얼마나 클지는 사실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호흡곤란 환자에겐 산소포화도의 수치가 거의 생명 수치처럼 느껴진다. 처음엔 90 가까이 올랐다가 점점 내려가는 아빠의 산소포화도 수치. 의사는 처음부터 가망 없다고 했지만 가족인 우리는 산소포화도가 70 이하로 떨어지고 다시는 수치를 회복할 기미가 없자 마음의 준비를 했다. 하지만 아빠는 끝까지 산소포화도 수치, 즉 생명을 포기하지 않으신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숨이 안 쉬어지는 것 말고는 어디 아픈 곳 없이 먹는 것도 주무시는 것도 모두 정상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고 마지막에 숨을 불어넣어 생령이 된 것처럼 숨을 거둬가시니 생명이 유지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사람에게 호흡이란 그리 중요한 것이었다. 마지막 날, 아빠의 산소포화도는 50 정도에서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가족들은 마지막이라 생각되어 모두 모여 있었지만 아빠는 끝까지 마지막 인사를 하지 않으셨다. 아빠는 숨이 안 쉬어지는 고통 속에서도 산소포화도 수치가 얼마인지 물으시며 끝까지 그 수치를 놓지 못하셨다. 아빠가 놓지 못하신 생명, 가족들이 먼저 마지막 인사를 할 순 없었다. 결국 아빠의 얼굴색이 변하고 호흡이 멎는 순간에야 가족들은 저마다 마지막 인사를 했다. 아빠는 그 인사를 듣기는 하셨을까? 언니는 그날을 회상하며 아빠의 숨이 조금이라도 더 오래 붙어있기를 바랐다고 했다. 나는 조금이라도 빨리 아빠의 고통이 끝났으면 했다. 어쩌면 그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일들이 내가 아빠의 마지막을 떠올리면 생각나는 것이다.          


그때의 엄마는 어떠했을까? 아빠가 아픈 동안 엄마는 주변인처럼 어느 정도 뒤로 물러나 있었다. 입원 당시 아빠의 병간호도 낮에는 내가(혹은 남편이), 밤에는 오빠가, 주말에는 경기도에서 언니가 내려와서 했었다. 평소허리도 제대로 못 펴시고 신경통으로 고생하는 엄마가 병간호하기 힘들다는 판단에서였지만 더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엄마랑 아빠 두 분만 같이 있으면 아빠는 모든 짜증과 화를 엄마에게 푸셨기 때문이었다. 그게 두 분이서 평생 만들어온 관계 설정이었다. 어쩌면 아빠가 입원해 있던 시간들은 집에 혼자 있는 엄마에겐 짧게나마 주어진 자유시간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빠가 방사선 치료를 모두 끝내고 상태가 조금 나아져 퇴원하던 날이 기억난다. 곧 아빠가 집에 오실 거라는 말에 엄마는 긴장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마치 곧 다가올 종말의 소식을 듣는 것처럼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했다. 나로선 엄마의 그 모습이 얼마나 슬펐던지. 평생을 어떻게 살아오셨기에 남편이 상태가 좋아져서 퇴원하는 날이 두려운 날이 되어버린 걸까. 50년을 같이 산 부부인데 왜 둘 사이는 좁혀지지 않는 걸까.


아빠가 돌아가신 뒤 엄마와 옆집 사는 우리는 아빠의 흔적들을 정리했다. 엄마 혼자서 남은 여생을 편하게 사실 수 있도록 집을 재정비했고, 많은 물건들을 치웠다. 그 과정에서 아빠의 물건들을 보고 추억에 잠기기도 했고, 아빠의 특이한 성격을 떠올리며 때론 웃기도, 때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기도 했다. 이제 엄마가 아빠의 그늘에서 벗어나 편히 사실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얼마가 될진 모르지만 진심으로 맘 편히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빠 눈치 볼일 없이 맘대로 일 보러 나갈 수 있고, 삼시 세끼를 시간 맞춰 차리지 않아도 되고, 무엇보다 아빠의 언어폭력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를 누릴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엄마는 얼마 지나지 않아 우울증에 걸렸다. 혈압이 거의 200까지 치솟아 잠을 못 주무셨고, 평소 하지 않던 온갖 걱정을 하며 불안해했다. 미운 정 고운 정을 떠나 같이 평생을 함께했던 사람의 빈자리가 이렇게 클 수 있다니 그전에는 정말 몰랐다.


작년에 '아버지의 해방일지'라는 책을 읽었다. 책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이 저마다의 사연을 가지고 있었지만 특히 감정이입이 많이 된 인물이 있었는데, 바로 작은 아버지였다. 평생을 빨치산이었던 형을 원망하며 자기 인생을 형의 탓으로 돌리며 살았던 작은 아버지.


'작은 아버지는 평생 형이라는 고삐에 묶인 소였다. 그 고삐가 풀렸다. 이제 작은 아버지는 어떻게 살까?... 일흔 가까운 나이에 처음으로 마주친 형 없는 세상. 탓할 사람 없는 세상이 두려워서. 두려움을 이기고 작은 아버지는 아버지의 장례식장에 찾아와 줄까.'  -아버지의 해방일지 중-


작은 아버지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난 엄마를 떠올렸다. 평생을 형의 그늘 아래에서 살다가 형 없는 세상을 마주친 책 속의 작은 아버지의 모습은 바로 평생을 탓하며 살던 남편이 사라진 세상을 마주친 엄마의 모습이었다. 엄마는 이제 탓할 사람이 없어져서 두려웠던 걸까, 아니면 아빠가 대신 걱정해 주던 세상, 이제 홀로 맞서야 하는 것이 두려웠을까. 아빠의 장례식장에서도 덤덤해 보였던 엄마가 일상에서 무너지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아팠다. 어쩌면 사람과 사람의 관계라는 것은 겉으로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닌, 그 속에는 이치로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부분이 얽히고설켜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아빠는 생전에 많은 부분에서 엄마를 힘들게 했지만, 또 다른 여러 부분에서 많은 일들을 책임지고 계셨다. 이제 그 일들을 혼자서 하나씩 해 나가면서 엄마는 아빠의 부재를 떠올리고 같이 살아온 삶을 떠올리실 것이다.


아빠의 장례식이 끝난 후 엄마가 남편과 나를 옆집으로 호출했다. 보일러 작동법을 모르겠다며 어떻게 하는 건지 알려달라고 하셨다. 작동법을 상세히 알려주자 엄마는 ' 느그 아빠가 생전에 보일러를 만지지도 못하게 했다며, 자신을 바보로 만들어놨다' 며 신세한탄을 하셨다. 아빠가 돌아가신 지 3년, 엄마는 지금도 보일러 작동법을 잘 모르신다. 옆집에 갔다가 '방이 왜 이리 차가워?' 하면 보일러 어떻게 돌리는지 모르겠다며 시원해서 좋으니 그냥 놔두라 하신다. 매달 아빠가 현관문에 적어 넣던 도시가스 검침도 이제 옆집 사는 우리가 적어 넣는다. 이번에는 반드시 배우겠다며 도시가스 사용량이 적힌 숫자 확인판을 보고 다짐하지만 한 달이 지나면 또 잊어버리고 우리를 부르는 건 여전하다. 아빠가 없는 세상, 엄마는 정녕 아빠로부터 해방된 걸까. 저녁에 옆집으로 가보면 거실에서 불을 꺼놓고 홀로 tv를 보고 계시는 엄마의 뒷모습이 참 쓸쓸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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