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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 예찬

by 인간 Feb 20. 2025
브런치 글 이미지 1

태어나 걸음마를 뗀 이후로
나는 늘 걸어 다녔다

내 두 다리는 고맙게도 지금까지
내 의지대로 움직여 준 고마운 교통수단이다
난 늘 걸어 다녔다
40년 이상 나는 차가 없는 뚜벅이었다

전역 후, 혹시나 쓸모가 있을까 싶어
1종 보통 면허를 취득했지만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운전대를 잡아본 적이 없다

그래도 사는 데 아무런 불편이 없었다

혹자는 자동차를 가지면
드라이브도 할 수 있고
이성을 만날 확률도 높아지고
직업 선택의 범위도 넓어진다고 하며
내게 자동차를 구입하라고 충고했지만
이젠 그런 시답지 않은 충고나 조언 따위는
웃으면서 넘겨버릴 수 있는 경지가 되었다

나는 걷는 게 좋다
100킬로그램이 넘었던 둔한 몸뚱어리도
걷기를 통해 날씬해졌다
하루에 4시간 이상 걸었던 것 같다
죽고 싶었을 때는 하루 7~8시간 이상 걸었다

남구 우암동에서 해운대까지
부산대학 앞에서 대연동까지
사하구에서 남구까지
범어사부터 연산동을 거쳐
수영까지 갔다가 다시 동래까지

부산 곳곳을 걸어 다녔다

그래서 그런지
내 신발은 수명이 짧다
지금까지 가장 자주 구입한 물건이 있다면
그건 바로 신발이다

이런 신발!!!

걷기는 고독의 체험이다
걷기는 자유의 경험이다
걷기는 관찰과 상상의 무궁무진한 근원이다
걷기는 뜻하지 않는 만남과 예기치 않은 놀라움이
가득한 길을 행복하게 즐기는 행위이다

비록 간단한 산책이라 하더라도 걷기는
오늘날 우리 사회의 성급하고 초조한
생활에서 독버섯처럼 피어나는

온갖 근심 걱정들을 잠시 멈추게 해 준다

두 발로 걷다 보면 몸에 대한 감각과
사물의 떨림들이 되살아나고
쳇바퀴 도는 듯한 사회생활에
가리고 지워져 있던 소중한 가치가 회복된다

시간은 그 자체가 쉴 줄 모르는 여행자이다
걷는 건 바로 그 시간 위를 여행하는 것이다

걸어서 떠나는 사람은 익명 속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을 즐긴다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익명의 시공간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간다

바로 그 시간, 그 자리에서

난 잠시 자유롭다

더 이상 시간을 지킬 필요가 없이
보내는 삶이 펼쳐진다
그게 바로 영원의 순간이다

오직 배고픔으로만 시간을 측정하고
잠이 올 때에야 비로소 끝이 나는 겨울 한나절


실제로 겪어보지 않고서는 가늠하지 못할 것이다

2011년 12월,
겨울 어느 날,
휴대전화와 지갑을 놓아두고 왔음을
퇴근길에 깨닫고 급히 돌아갔으나
회사 출입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사하구에서 남구 감만동까지 걸었다
오후 11시 30분에 시작된 걷기는
새벽 4시가 되어서야 끝났다

그날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했었기 때문에
심한 갈증을 느꼈고 허기도 밀려왔다

장거리를 오랜 시간 걷고 난 뒤의
허기와 달콤한 피로가
뒷받침하게 되면, 별것 아닌 음식이
침을 고이게 하는 미식으로 변한다
타는 듯한 목마름의 끝이라면
한 잔의 물도 최고급 포도주의 풍미를
느끼게 해 준다

고양이 걸음으로 살금살금
걸어 들어간 고시원 그 좁은
나만의 관짝 안에서,
흰쌀밥에 고추장만 넣어 비벼 먹었다
허겁지겁 먹다가 목이 막혀
아주 오랫동안 청소를 하지 않은 듯 보이는
꼬질꼬질 더러운 고시원 정수기에서
물을 받아 마셨다

고추장 비빔밥과 정수기 물은
최고의 만찬이었고 최상의 음료였다

한 끼의 검소한 식사가
때로는 최고의 만찬보다 더 나은 것이니,
그 포만감과 유쾌함은 지워지지 않을
기억으로 남는다

허기와 갈증을 해결한 후
갑자기 밀려드는 노곤한 졸음

나는 그 좁은 관짝 안에서도
곤히 잠들 수 있었다
참으로 꿀맛 같은 잠이었다

모든 초라한 잠자리가 폭신폭신하게
느껴질 정도로 피곤을 맛보고
시장기가, 별 볼일 없는 투박한 음식에
달콤한 양념이 되어 줄 정도로
배를 곯아보는 건 나쁘지 않다
시장이 반찬이다

차를 가지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다
아마 숨이 넘어갈 때까지
나에겐 차가 없을 것 같다

나는 걷는 사람들을 좋아한다
이 세상 모든 뚜벅이들을 사랑한다
한가롭게 혼자 이리저리 거니는
루소를 닮은 고독한 산보자를 사랑한다

걷는 걸 즐기는 사람들은
자유와 평화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고
장자가 말한 소요유의 미덕을

진정으로 아는 사람들이라 생각한다

발로 걷는 사람은 자동차를 운전하는 사람
혹은 기차, 비행기를 이용하는 사람처럼
타인에게 거만하게 구는 일이 적을 것이다

왜냐하면, 보행자는 언제나 인간의 높이에서
서서 걸으므로 한 걸음 한 걸음 떼어놓을 때마다
세상이 거칠다는 것을 느끼고, 길에서 지나치게
되는 행인들과 우정 어린 타협을 이룰 필요를
절감하기 때문이다


좁은 보행로에서 서로 마주친 사람들은

서로가 조금씩 양보해야만

비로소 세상이 평화로울 수 있음을

온몸으로 인식하고, 그 인식을

온몸으로 아름답게 표현한다

차가 없으면 불편하지 않냐고
누군가 내게 물어본다

나는 대답한다
편리함 속에 자유와 사랑은 없다고

비록,
내 대답의 의미를
이해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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