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관적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게을러서는 안 된다.
게으른 사람은 객관적 실체에 접근할 수 없다.
너무 바빠서 시간과 에너지가 없는 사람도 객관적 실체에 접근할 수 없다.
수많은 주관들이 저마다 자신이 객관이라고 주장한다.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는 꼬락서니로 사건의 일부만 보여준다.
사건의 전체 중에서도 자신의 구미에 맞는 일부만 편집해서 그걸 객관이라고 우긴다.
자신이 객관적이라고 주장하는 인간들은 결국 자신이 주관적이라고 광고하고 있는 것이다.
객관적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상당히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하나의 사건에 관련된 모은 주관적 주장들을 모두 검토해 보고, 종합해야만
비로소 객관적 실체 비슷한 것에 접근할 수 있다.
대표적인 대중 매체인 영화의 표현방식은 다분히 주관적이다. 하나의 사례를 들어본다.
사이코패스가 조연인 영화가 있다. 영화의 주인공들은 모두 그에게 죽임을 당하는 피해자들이다. 일반적으로 피해자들이 모두 약자이고, 생전에 선한 사람으로 묘사되는 것과는 다르게 이 영화의 감독은 피해자들을 모두 악인으로 묘사한다. 그것도 아주 암시적이고 간접적인 방식으로.
피해자 A: 결혼을 하고 싶지 않았지만, 혼자 생계를 꾸려나갈 능력도 의지도 없다. 아버지의 폭력 앞에서 늘 무기력했던 그녀는, 결국 양아치 비슷한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게 되고, 마침내 자신이 그렇게도 바라던 탈출을 하게 된다. 지옥 같던 집구석을 마침내 벗어나게 된다. 그러나 그녀의 결혼은 불행의 시작이었다. 남편은 알코올과 도박에 중독된 폭력적이고 무책임한 남자였다. 그녀는 그에게 매일 폭언을 듣고 학대를 당한다. 그들 사이에서 아이가 하나 태어난다. 남자아이다. 아이는 남편의 외모를 쏙 빼어 닮았다. 아이가 자랄수록 그녀는 남편에 분노를 아들에게 투사하게 된다. 때리고 욕을 하고 말을 듣지 않으면 하루 종일 지하실에 가두어 놓기도 한다. 밥을 굶기고, 추운 겨울 발가벗겨서 내쫓기도 한다. 아이의 몸에는 멍자국이 없어질 날이 없다. 그녀는 어느 날 밤, 남편과의 다툼 중에 우발적으로 남편을 식칼로 찔러 죽인다. 그리고 자신의 살인을 목격한 아들을 지하실에 가두어 놓고 내연남과 도망을 친다. 아이는 지하실에서 공포와 두려움에 떨다가 비참하게 굶어 죽는다. 아들을 유기하고 내연남과 도망친 그녀는 노래방 도우미를 하며 생계를 이어나가게 되고,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마를 만나 살해당한다. 이 부분에서 감독은 살인마의 잔혹한 살인을 자세하게 묘사하지 않고 넘어간다. 그녀가 살인마의 차에 타고 떠나는 장면에서 더 이상 나아가지 않고 묘사를 멈추는 것이다. 그녀의 토막 난 시체는 몇 달 후, 인근의 야산을 지나가던 등산객에 의해 우연히 발견된다.
피해자 B : 피해자 A의 내연남인 그는, 그녀의 전남편에 맞먹는 쓰레기이다. 마약 중독자에다가 도박 중독자인 그는 창녀들의 포주 노릇을 하면서 그 비루한 목숨을 유지하고 있다. 오갈 데 없는 가출 소녀들을 강간하고 협박을 해서 창녀로 일하게 만든다. 그녀들에게 막대한 빚을 지게 만들고 꼼짝없이 노예 신세로 만들어 폭력을 통해 길들이며 억압과 착취를 일삼는다. 자신의 내연녀 A가 자신의 돈을 챙겨 도망친 뒤 행적을 감추자 마치 하이에나처럼 그녀의 행방을 추적한다. 그러던 과정에서 말없는 연쇄살인마를 만나게 되고, 그 역시 어떤 호수에서 심하게 부패된 시체로 발견된다. 감독은 잔혹한 살해 장면을 모두 삭제해 버린다. 연쇄 살인마의 대사도 거의 없다. 피해자 B가 연쇄 살인마의 집을 찾아 그 집으로 들어가는 장면에서 모든 묘사를 멈춘다.
피해자 C : 피해자 A와 B의 살인 사건을 수사하는 경찰이다. 그는 부패한 경찰이다. 피해자의 B 뿐만 아니라, 자신의 관할 지역의 모든 유흥업소 업주들의 뒤를 봐주고 단속 정보를 흘리는 대가로 매달 정기적인 상납을 받는다. 인근 조폭들과도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마약 유통에 깊숙이 개입하여 조폭들로부터 이권의 일부를 강탈하기도 한다. 그는 주식과 부동산 투자를 했다가 큰 손해를 입었다. 아내와 장인을 설득하여 그들의 도움을 받아 막대한 투자를 했지만 모드 잃은 상태다. 그는 자신의 실패를 감추기 위해 조폭들과 공모하여 장인을 살해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자신의 비리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는 포주 B가 실종이 되자, 그의 행방을 찾아 나선다. 최근, 그로부터 은밀한 협박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B가 종적을 감추자 몹시 불안해한다. 그는 B를 찾아서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그를 추적하다가 연쇄 살인마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는 며칠 후, 목과 옆구리, 왼쪽 가슴에 날카로운 자상을 입은 사체 상태로 발견된다. 감독은 이때도 연쇄 살인마의 대사를 최대한 줄이고, 잔혹한 상황 묘사를 하지 않는다. 그저 결과만 보여줄 뿐이다.
이 영화가 끝난 후, 연쇄 살인마를 욕할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 같다.
같은 사건이라도 등장인물에 대한 묘사를 어떻게 하느냐, 대사처리와 상황 묘사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관객이 느끼는 감정은 달라진다. 이 영화에서 피해자들은 죽어 마땅한 인간 또는 죽어도 그리 가슴 아프지 않은 인간들이 되어 버린다. 연쇄 살인마는 오히려 의인에 가깝게 보일 수도 있다. 이 영화를 본 관객들 중에서 연쇄 살인마를 욕할 사람들이 몇이나 있을까?
같은 사건이지만, 포인트를 연쇄 살인마에 두고 사건과 인물에 대한 묘사를 한다면, 상황은 완전히 뒤바뀐다. 연쇄 살인마의 성장 과정을 완전히 배제한 상태에서 그의 잔혹성과 잔인함을 부각하고, 피해자들의 모든 악행들을 과감하게 삭제해 버린다면, 그리고, 피해자들을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었던 지인들을 등장시켜, 피해자들이 어려운 상황과 조건 속에서도 나름대로 열심히 살기 위해 노력한 사람들로 묘사한다면, 판은 완전히 뒤집어진다. 연쇄 살인마는 성실하게 살아가던 무고한 동료 시민을 아무런 이유도 없이 오직 자신의 쾌락을 위해 살해한 악마가 되어버린다. 감독의 묘사가 끝나는 그 순간, 그는 죽어 마땅한 인간 이하의 버러지 또는 짐승으로 전락한다.
영화가 이렇다면 과연 뉴스는 객관적인가? 신문은 객관적인가? 다큐멘터리는 객관적인가?
탐사 보도는 정말 객관적인가? 위에서 예시로 들었던 영화의 감독의 의지가 영화에 개입되었던 것처럼 프로듀서나 제작자의 의도가 전혀 개입되지 않았는가? 그들은 한 사건의 객관적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과연 얼마나 긴 지속적인 노력과 성찰의 시간을 보냈는가?
어쩌면 위의 영화의 감독처럼 자신이 보여주고 싶은 내용만 선택해서 교묘하게 편집한 후, 마치 객관적 기록물인 것처럼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자신들만이 객관적이라고 광고하면서 말이다.
언론은 자신들이 보여주고 싶은 것만 선별하여 대중에게 보여준다. 대중매체가 객관적이라고 믿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사건들의 객관적 실체를 파악하여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사건에 대해 저마다 자신이 객관적이라고 주장하는 모든 주관적 주장들을 모두 살펴보아야만 한다. 정반대의 주장들이 있다면 양쪽의 주장을 모두 냉정하게 살펴봐야만 한다. 그들의 주관적인 주장들이 부딪히고 갈등하는 그 부분에 바로 사건의 객관적 실체가 교묘하게 숨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