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께서는 내가 나고 자란 소도시의 토박이시다. 그래서 우리 집에서 멀지 않은 거리에 큰집도 있고 외갓집도 있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아파트에 살았지만 조부모님 댁은 당연스럽게도 주택이었고, 부모님은 나와 동생이 뛰어놀 공간을 마련해 주기 위해서 한 주는 큰집, 그다음 주는 외갓집을 오가셨다. 시골 조부모님 댁에 자주 방문한다는 것에 대한 장점은 비단 아이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는데, 할아버지 댁에서 가져온 다양한 식재료 덕분에 우리 집에는 언제나 양파와 마늘, 파, 고추 등의 채소가 풍부했다.
나는 큰집에 가는 것보다 외갓집에 가는 것을 더 좋아했다. 이는 어려서부터 엄마와 더 오랜 시간을 보낸 특성상, 엄마 쪽 가족에 괜한 친밀함이 느껴진 까닭도 있겠지만, 외할머니께서 작은 구멍가게를 하신 이유가 더 크다.
시골에서 나름 대로변이라 할 수 있는 버스가 다니는 길가 바로 옆에 위치한 할머니의 구멍가게는 그야말로 보물창고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3평이 채 되지 않을 것 같은 그 작은 가게 한가운데에는 동네 어르신들이 언제든 모여서 막거리를 마실 수 있는, 뒷산 죽은 나무를 주워다 외할아버지께서 직접 만드신 테이블과 벤치의자가 놓여 있었다. 그 가장자리로는 3층짜리 선반이 듬성듬성 놓여 있었고, 꿀꽈배기, 맛동산, 새우깡 등 지금까지도 여전히 내 주머니 속 잔돈을 앗아가는 과자들이 상자 째 들어차 있었다. 선반 옆으로는 아이스크림 기계가 있었는데, 100원짜리 아이스크림부터 당시 700원이나 하던 월드콘까지 형형색색의 얼음과자들이 종류별로 들어 있었다.
덜컹거리는 차 안에서 미세한 멀미를 겪다가 외갓집에 도착하면 구멍가게부터 찾았다. 외할머니는 길어야 2주 만에 보는 나와 동생을 격하게 껴안아주셨고, 여름이면 당시에는 쉽게 사 먹을 엄두를 못 냈던 더블비얀코 아이스크림을 슬쩍 손에 쥐어주시거나, 겨울이 되면 갓 데운 가래떡을 꼬챙이에 꽂아 전해주곤 하셨다. 가끔은 엄마가 불량스럽다고 먹지 못하게 했던 과자들을 주머니에 찔러 넣어 주시면서 당나무 아래 가서 엄마 몰래 먹으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나와 동생은 가게 앞 볕 좋은 곳에 놓인 평상에 드누워 파란 하늘을 바라보기도 했고, 할머니께서 알려주신 당나무 아래에 숨어 집에서는 못하던 군것질을 해대면서 엄마의 잔소리를 듣지 않아도 되어 참 조용하다는 생각도 했다.
외갓집이 있던 마을은 내가 태어난 소도시에서도 볕 좋고 따숩기로 유명했던 곳이라, 아직도 그곳에서 나를 비추던 따스한 햇살과 살랑거리는 바람이 생각난다. 봄이면 꽃내음을 안은 것 같은 기분 좋은 바람이 머리카락을 스쳤고, 더운 여름조차도 마당에 크게 자라난 비파나무 아래에 누워 눈을 붙이면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었다. 벼이삭이 영글어 고개를 숙이는 가을은 더할 나위 없었고, 겨울에도 큰 바람은 주변의 산들이 전부 막아주는지, 창문을 활짝 열어 환기를 시킬 때야 겨우 차가움을 느낄 수 있던. 엄마가 나고 자란 그 집은 언제나 따뜻하고 포근한 곳이라 느껴졌다.
엄마는 외갓집에 도착하면 으레 당당해 보였다. 어렸을 적부터 누린 익숙하던 공간이라 그런지, 뭐가 어디에 있는지 척척 한 손에 필요한 것을 찾으며 마당과 창고까지 한눈에 들어오는 그 공간을 마음껏 누비고 다니셨다. 아파트인 우리 집에서는 왠지 모르게 느껴지던 조심스러운 엄마의 행동이 외갓집에서는 마치 승전 후 돌아오는 장군처럼 의기양양해 보였고, 이상하게도 그런 기분을 느낄 때면 상대적으로 아빠의 행동은 조심스러웠고, 가끔은 소심해 보이기까지 했다. 나는 어린 나이에도 엄마가 엄마 집에 와서 기분이 좋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 외갓집의 포근함은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신 뒤 빛을 잃어버렸다. 외갓집에만 가면 그렇게 당당해 보였던 엄마에게 그 공간은 텅 비어 어쩌면 다시는 채워질 수 없는 곳이 된 듯했고, 그 슬픈 일을 겪은 후 몇 해가 지난 뒤에도 더 어렸을 적 내가 피부로 느끼곤 했던 따스함을 느끼는 것은 쉽지 않았다. 외할아버지를 돌보러 며칠에 한 번 꼴로 외갓집을 방문하던 엄마는 지쳐 보였다. 나는 힘이 되고 싶었으나 옆에서 엄마 손을 잡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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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이래서 시간이 약이라고 하는 것인지, 엄마는 강산이 두 번이나 변할 수도 있는 그 시기를 잘 견뎠고, 그 상실감은 어느덧 일상적인 감정이 된 듯하다. 하지만 엄마의 마음 한편에는 언제든 불쑥 찾아올 수 있는 슬픔이 자리 잡고 있을 것이며, 그 슬픔의 크기만큼이나 짙어진 그리움의 감정이 큰 숲을 이뤘을 것을 나는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엄마는 다시금 예전의 그 당당함을 되찾았다. 엄마는 아빠와 함께 오랜 시간 동안 방치되어 있던 외갓집의 정원을 다시 일궜고, 장미꽃이 만발하여 조명을 킨 듯했던 그 과거의 영광을 다시금 되찾아오셨다. 벼가 잘 익어가던 논밭에서 아무것도 자라지 않던 휑량한 논두렁이었던 시기를 잘 버틴 뒷마당 너머의 땅을 비옥한 고추농장으로 탈바꿈시켰다. 그리고 부모님의 오랜 돌봄 덕분에 외할아버지는 노쇠했지만 여전히 건강하시다.
그렇게 엄마는 식어가던 외갓집에 다시금 따스함을 불러왔다. 그리고 엄마 스스로의 감정에서도 구름을 걷어내고 따뜻한 볕을 살려내었다. 그래서인지 예전과는 또 다른 당당함이 느껴지는 엄마를 나는 항상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