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가온 Sep 25. 2024

엄마와 명절


어린 시절, 명절이 다가오면 마음 한구석에 무거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우리 집은 친가와 외가 모두 가까운 거리에 있었기에 명절에 길게 이동할 필요가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무척 행운이지만, 당시의 나는 친구들이 들뜬 목소리로 나누는 몇 시간 간의 귀성길 이야기에 낄 수 없었고, 그것이 때로는 소외감과 왠지 모를 부러움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명절이 달갑지 않았던 이유는 단지 그 때문만은 아니었는데, 어린 눈에도 보이는 명절에 고생하는 엄마에 대한 안쓰러움도 한몫했었다. 지금은 참 세상이 많이 바뀌었지만, 거의 이십 년 전만 해도 엄마들의 역할이 명절이면 유독 고되어 보였다. 차례상을 차리고 오래간만에 모두 모인 식구들이 먹을 음식을 만드느라고 엄마는 장을 보고, 재료를 다듬고, 꼬치에 무언가를 꿰어 찌고 익히는 과정을 거치느라 꼬박 이틀부엌에서 보내야 했다. 행위들이 어린 나의 눈에도 힘겨워보였고, 그래서 명절은 별로라는 생각을 줄곧 했었다.  


명절 전날, 할아버지 댁에 도착하면 엄마는 곧장 부엌으로 향했다. 큰어머니께서 이미 신문지 위에 갖가지 재료들을 널어놓고 음식 할 채비를 해두신 상태지만, 부엌은 곧 엄마의 무대가 되었다. 각종 생선들이 찜기에 들어갈 준비를 마치면 이어지는 것은 다양한 전과 꼬치들. 새우전, 동태전, 동그랑땡, 부추전, 호박전에 5색 꼬치까지. 그 전들을 만들기 위해 엄마는 끊임없이 칼질을 해댔고, 반죽을 만들었으며, 가끔은 팔목에 작은 물집까지 잡혀가며 그 재료들을 익히는 과정을 반복했다. 엄마 옆에서 기다란 꼬챙이를 손에 쥐고 5색 꼬치를 완성하면 이내 노릇노릇한 계란 옷을 입은 맛깔난 음식으로 탄생했다. 


그렇게 기름냄새가 진하게 배어 있던 부엌에서의 하루가 끝나고, 작은 방에서 온 가족이 잠에 들 때면, 바깥에서 들리는 온갖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추석 무렵이면 멀리서 귀뚜라미와 개구리 우는 소리가 아스라이 들렸고, 설날 무렵이면 창 밖으로 불어오는 성난 바람 소리가 매섭게 느껴졌다. 엄마는 피곤한 몸을 잠 속으로 내던졌지만, 역시나 그녀에게도 편안한 이부자리는 아니었기에 이내 나와 동생을 살피거나 동 틀 무렵이면 방문 밖에서 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곤 하셨다.  


그렇게 뒤척이던 밤을 지나 아침 무렵 눈을 뜨면 엄마는 항상 없었다. 엄마의 이부자리는 깨끗하게 개어져 있었고, 졸린 눈을 비비며 거실로 나가면 부엌 쪽에서는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솔솔 풍겨왔다. 엄마는 환한 미소로 나를 맞아주면서, 이내 얼른 씻으라고 나를 다그쳤고, 주변을 둘러보면 갓 나온 따끈한 나물반찬이 부엌의 빈 공간을 빼곡히 채우고 있었다. 


차례를 지내고 난 후에도 엄마들의 일은 끝나지 않았다. 온 식구가 둘러앉아 먹을 상을 차리고, 식사가 끝나면 설거지를 해야 했고, 가끔은 누군가의 청승맞은 요청에 의해 커피까지 끓여야 했다. 마치 끝없는 퀘스트를 하나씩 해결하는 것처럼, 하나가 끝나면 하나가 시작되었고 살짝 때 늦은 점심을 먹고 나서야 외갓집으로 향할 수 있었다. 


그렇게 엄마의 집에 도착하면, 잠시 숨을 돌린 그녀는 가벼운 저녁 식사를 마친 다음 외숙모들이 힘들다며 서둘러 우리 집으로 출발할 채비를 하였다. 그렇게 차로 20분가량을 달려 다시 우리 집에 도착하면 엄마의 퀘스트는 종료되었고, 드디어 두 발을 뻗고 쉴 수 있었다. 




엄마의 퀘스트 집약체로 느껴진 그간의 명절들은 내가 이십 대 후반이 되었을 때 드디어 끝을 맞이했다. 아빠는 이제 나와 동생이 고향집까지 내려가기가 힘들어지자, 큰댁에서 보내는 명절을 더 이상 고집하지 않기로 하셨고 그 결정은 엄마에게 드디어 명절 노동에서 해방될 수 있는 자유를 안겨주었기 때문이다. 부모님은 '정챗길'과 '귀성길'이라는 단어를 스스로 선택해 주셨고, 나는 부모님을 맞이하는 역귀성의 형태로 명절을 보내기 시작했다. 엄마는 오랜 시간 들고 있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 해방되었다.


아직도 명절이 되면 어렸을 적 장면이 그려진다. 할아버지 댁에서 엄마가 부엌에서 분주히 움직이던 모습, 고소한 냄새가 가득했던 낡은 부엌, 그리고 그 과정을 지켜보던 나의 감정들. 지금의 명절은 그때와는 많이 달라졌고 엄마와 나의 삶에 여유가 생겼는데, 어쩌면 이것은 오랜 기간 동안 힘든 퀘스트를 묵묵히 마무리해왔던 우리 엄마들 덕분이 아닐까 싶다. 

이전 06화 엄마의 눈물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