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엄마를 강인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타인 앞에서 쉽게 굽혀지지 않으면서도 옳고 그름이 확실해서 더욱 당당하게 느껴졌다. 그런 엄마는 내 눈에 대단해 보였지만 가끔은 엄격해 보이는 모습에 마음을 졸이기도 했다.
그런 엄마에게도 의외의 약점이 있었으니, 바로 눈물이었다. 강인해 보이던 엄마는 KBS 프로그램 '아침마당'을 볼 때, 잃어버린 가족을 찾는 코너가 나오면 무조건 손수건이 필요했고, 저녁 8시 30분에 시작하는 일일 연속극 속의 주인공이 눈물을 흘릴 때면 어느새 그녀의 뺨에도 굵은 이슬이 떨어지곤 했다. 강해 보이던 엄마의 눈물샘은 꽤나 연약해서 언제든 터질 준비가 된 듯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기억에 남는 두 가지 사건이 있다.
내가 스무 살이 되던 해의 일이다. 나는 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는데,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도시로 이동해야만 했다. 대학교의 기숙사에 합격하는 것은 꽤나 어려운 일이었는데, 나는 학과 신입생 중 고향집과 학교의 거리가 가장 먼 사람 중 몇 명에 속하여 기숙사에 선정될 수 있었다. 스무 살이라는 단어가 주는 기대감과 새로운 사람들을 만난다는 설렘이 집을 떠난다는 불안함보다 더 크고 값지게 다가왔다.
기숙사 생활은 처음인지라, 준비할 것이 무척 많았는데 계절 별 옷부터 화장품, 집에서는 당연한 듯이 사용하던 생필품까지 일단은 모두 꾸려야 했다. 생각보다 준비할 것이 많아서 당황스러운 나를 뒤로한 채, 엄마는 내가 기숙사로 떠나기 몇 주일 전부터 옷가지며, 샴푸며 트리트먼트, 심지어는 면봉처럼 사소한 것들까지 하나하나 챙기기 시작했다.
"엄마. 거기도 다 사람 사는 동네야. 가서 천천히 내가 사면 된다."라고 말을 하면 엄마는
"혹시 모른다." 라며 빠진 물건이 없는지 찾으셨다. 모든 것이 부족함 없이 갖춰져 있어야지만 마음이 편한 엄마의 성격을 모를 리가 없는 나는, 내가 하면 사실 귀찮기만 한 그 행위를 엄마가 대신해주는 것을 은근히 즐겼다.
드디어 기숙사로 떠나는 날, 운전하는 아빠 옆에 앉은 엄마는 별 말이 없었다. 창밖을 바라보았다가 잠에 들었다가, 드디어 몇 시간 만에 도착한 기숙사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휑량했고, 어쩐지 따뜻하지 않고 사무적인 기분이 감돌았다. 엄마는 나를 데리고 기숙사 방에 들어가서 좁은 공간 속 더 작은 내 공간을 꼼꼼히 살폈다. 크게 열리지도 않는 창문을 몇 번이나 확인하셨고, 아래에는 책상과 옷장이 있고 위층에는 침대가 있는 특이한 구조의 가구를 몇 번이나 살피셨다.
나는 가만히 서서 엄마가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작은 방이었지만 마치 청약받은 집을 살피는 마냥, 엄마는 우리 집처럼 살뜰히 살펴보고 계셨다. 짐을 모두 정리하고 나서야 엄마는 내게 물었다.
"잘 지낼 수 있겠나?"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당연하지. 이제 스무 살인데."
그렇게 엄마는 나를 기숙사에 내려주고 고향으로 돌아가셨다. 우리의 이별은 심플했는데, 엄마는 별다른 눈물 없이 차에 오르셨고, 이내 떠나는 차를 뒤로한 채 나는 새로 사귄 대학 친구들에게 연락을 돌렸다.
그렇게 아무 일도 없이 헤어진 줄로만 알았는데, 훗날 아빠는 그날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엄마가 펑펑 눈물을 흘렸다고 말해주셨다. 엄마는 나를 떠나보내고 돌아가는 길 내내 흐느끼며 울었다고 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헤어져놓고선.... 무슨 눈물이래' 생각하면서도 그 말을 듣자 울컥 마음이 아려왔다.
사회 초년생이 된 딸에 대한 걱정과, 멀리 떨어진 낯선 땅에서 혼자 살아가야 하는 나에 대한 불안감이 그 눈물에 담겨 있었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그건 비단 나의 자립에 대한 엄마의 걱정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엄마가 자식과 멀어진다는 상실감이었을지도 모른다. 엄마는 스무 살이 된 내가 스스로의 삶을 시작한 그 순간을 기뻐하기보다는, 이제는 자주 볼 수 없다는 현실에 눈물이 터졌을지도 모른다. 엄마는 강해 보였지만, 그날만큼은 갓 스무 살이 된 나를 향한 무한한 사랑과 걱정이 그대로 쏟아져 나왔던 것이다.
나는 그 멀리 떨어진 곳에서 대학을 마쳤고, 취업을 했으며,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스무 살의 이별을 겪은 뒤 십여 년이 흘렀기에 엄마도 나도 떨어져 사는 것이 익숙할 만큼 무뎌져서, 가끔 내가 고향집에 가거나 엄마가 나의 신혼집으로 올라오시어 함께 보내는 소중한 시간까지도 은근한 불편함으로 다가오는 때도 있었다.
그렇게 엄마와 나는 여전히 물리적으로 가까워지지 못한 채로 살아갔다. 결혼 후 나는 주말부부가 되었는데, 그래서 주중에는 혼자 집을 지켜야 하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누군가는 주말부부를 3대가 덕을 쌓아야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농담처럼 말하곤 했지만, 나에게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온 당황스러운 기회였다. 혼자 남겨진 집은 조용했고, 특히 저녁 무렵 적막이 느껴지면 텅 빈 것 같은 집 안에서 내 마음은 더욱 고요히 가라앉곤 했다.
엄마는 나의 가장 긴 통화 친구가 되어 주었다. 매일 저녁, 나는 엄마와 전화기를 붙들고 긴 이야기를 나눴다. 별거 아닌 사소한 이야기부터, 속 깊은 이야기까지 엄마와 나는 구구절절 수다를 떨었다. 가끔 이야기의 소잿거리가 떨어지면 친구의 친구 이야기, 엄마 친구의 아들 이야기 등 어디서 샘솟는지 엄마는 새로운 주젯거리를 던졌고, 침대에 누워서 넌지시 엄마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 나는 가끔은 엄마의 목소리에 열정적으로 반응했다가, 가끔은 얼른 잠들고 싶은 마음에 심드렁한 목소리를 내비치기도 했다. 그렇게 엄마는 나의 허전함을 채워주었고, 나는 그런 엄마가 고마우면서도 엄마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엄마는 내가 주말부부가 된다는 소식을 듣고 또 한 번 눈물을 흘리셨다고 했다. 엄마는 내가 겁이 많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어렸을 적 나는 천둥번개가 치면 무서워서 엄마 품을 찾아가곤 했었다. 혼자서는 어둠을 견디지 못하고, 작은 소리에도 불안해했던 나를 생각하는 엄마에게 나는, 어느덧 심 십 대가 되었지만 여전히 어린아이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혼자 남아 매일의 저녁을 지내야 한다는 사실이 엄마에게는 또다시 걱정거리로 다가왔을 것이다. 천둥이라도 치는 밤이면 내가 혼자서 외로워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들이 엄마의 마음속에 쌓여 또 한 번 터졌다고 했다.
나는 몰랐다. 이만하면 다 컸다고 생각했던 스무 살 무렵에도, 이제 정말로 다 컸다고 생각하는 삼십 대가 되었을 때에도 그녀의 눈에 나는 여전히 불안정한 아이로 남아있다는 사실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마냥 강인하다고 생각했던 우리 엄마였지만 그 눈물샘은 나를 향한 염려로 넘실거린다는 것도 훗날 알게 되었다.
이제는 주말부부 생활이 종료되었고, 엄마와 나는 여전히 멀리 떨어진 채 각자의 삶을 이어가고 있다. 엄마도 나도 안정적인 생활을 하고 있지만, 나와 우리 가족을 생각하는 엄마의 마음은 항상 촉촉이 젖어 있을 것 같다. 앞으로는 엄마의 눈물이 예전만큼 자주 흐르지 않기를 바라지만, 혹시나 그 샘이 다시 터진다고 하더라도 이제는 그 투명한 방울의 오롯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