웬만한 사람이비슷하겠지만 어렸을 적에 일기 쓰는 것을 참 싫어했다. 학교와 집을 오가는 비슷한 하루의 반복 안에서 작은 이벤트를 찾는 것도 귀찮고, 스토리 건수를 찾았다고 하더라도 사실나열에서 그치면 안 되고감동과 배운 점을 남겨야 할 것 같아서 부담스럽기까지 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잘 밤에 책상에 앉아 각 잡고 일기를 쓰기는 싫고, 그렇다고 엎드려서 몇 자 끄적여 내려가다 보면 얼마 지나지 않아 팔꿈치가 아프고 눌린 배가 불편해졌는데, 그 육체적인 답답함까지 아직 생생히 기억난다.
사춘기 시절부터는기록하며 나의 흔적을 남기는 행위가 덜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열네다섯 살, 한창 과도기 시절에는 친구 사이에서 혼자 느낀 섭섭한 감정, 남몰래 감추고 싶은 나의 고민 따위를 일기장에 토로하곤 했다. 그때 생긴 습관인지, 고등학생 시절을 지나 음주가무에 눈 떴던 대학생 시절에도 그랬고, 특히나 취업 준비생으로 생활하던(흑)역사의 시절에 가장 많은 일기를 쓰며 나에 대한 기록을 남겼던 것 같다.
그러면서 느낀 점은,'내가 남기는 짧은 문장들 또한 나의 흔적이자 재산이고, 나의 일부'라는것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기억과느낌은 결국 흐릿해지지만 글로써 짧게나마순간의 감정을 남겨두면 그것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것 같은. 아련하면서도 영원한 것 같은 느낌이 좋았다.
회사에서 사용하던 책상과 주변을 정리하기 위해 야근을 자처했다. 소음이 발생해서 주위 동료들에게 피해를 줄 것을 방지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고, 다른 사람 신경 쓰지 않고 마음 편하게 버릴 것은 확실히 버려가며정리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이쁘다고 사 모았다가 한 장 쓰는 게 아까워서 제대로사용도 못 한 포스트잇 무더기가 나왔다.
업무용 다이어리 잘 써보겠다고 색색깔로 샀다가 모셔만 두던 펜 다발도 발굴되었다.
탄산음료 끊겠다고 직원들 모아 호기롭게 주문했던 콤부차도 레몬맛, 파인애플맛, 최신형 샤인머스캣맛으로 한 줌이 발견되었다.
행사 기념품으로 받아놓았다가 쓸 타이밍 놓쳐서 사용하지 못했던 그립톡도 등장했고 언제 받은 것인지조차 기억나지 않는 대용량 usb 도 책상 서랍에서 등장했다.
그리고 책상 아래쪽 저 끝, a4 박스에 처박히듯 쌓여 있던 나의 4년 치 업무용 다이어리가 등장했다.
반가운 마음에 입가에 미소를 띠고 다이어리를 훑어봤다.
입사 초기에 사용하던 것에는 취업의 기쁜 마음을 담은 포부가 가장 첫 페이지에 적혀있었다.
당시에 추진했던 매일의 업무가 적혀있었고, 지금이면 눈 감고도 할 수 있는 업무의 매뉴얼이 서툴게 기록되어 있었다.
특정 업무를 수행하다가 제대로 해결되지 않아서 고민한 흔적도 보였고, 그러한 고민이 해결되었을 때의 팁도 간략히 기록되어 있었다.
5년 전의 나는 다이어리 속에서 '내일'의 나에게, 그리고 그것을 지켜보는 더 성장한 나에게 끊임없이 재잘재잘 이야기 하고 있었다.
입사 초기와는 사뭇 다른 크기의책임이 따르는 업무를 수행하게 된 지금의 내가 대견했다. 몇 해 전의 나는 못 한다고 생각했을 업무들을 지금의 나는 능숙하게 행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아차렸다.
지난 다이어리를 훑어봤을 뿐인데 앞으로 어떠한 일이 눈앞에 닥쳐도 결국에는 해낼 수밖에 없다는 자신감도 강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