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다음 문장이 떠오르지 않아 빈 화면을 바라보고 있는 어느 무명작가처럼 한참 동안이나 한컴오피스 한글 속 흰 바탕만 바라보고 있었다. 첫 물꼬만 잘 트이면 술술 써내려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처음 한 줄을 작성하기가 무척 어려웠다.
난도가 높은 업무에 대한 내용을 먼저 작성해야 할까? 빈번하게 추진하는 업무에 대한 내용부터 작성해야 하는 걸까?후임자의 멘탈을 보존하기 위해 가장 만만하고 쉬운 일을 초두에 가볍게 작성하고 넘어가는 것이 좋은 걸까?
그것도 아니라면 지금 가장 뜨겁게 진행되고 있는 일에 대한 내용으로 시작할까?
'시작'에 대한 고민을 거듭하다가 가장 원초적은 질문에 결국 도달했다.... 나는 지금까지 무슨 일을 하고 있었던 거지?
내 일을 알려주기가 왜 이렇게 어려운 걸까.
그리고 도대체 어디까지 써야 하는 거지?
나는 얼굴도 모를 그 사람을 위해 얼마나 친절해야 하는 걸까.
인수인계서를 작성하는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이번 회사에서 정규직은 처음이었다 할지라도 이미 몇 차례의 인턴 업무과 계약직을 전전했기에 나름 '돈벌이' 10년 차에 접어든 어엿한 직장인이었다. 그리고 그전 회사에서 (아무리) 짧게 근무를 했더라도 인정욕구가 강한 성격 상 인수인계서를 대충 작성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a부터 z까지. 1부터 100까지. ㄱ부터 ㅎ까지.
예전의 내가 인수인계서를 작성했던 원칙은 '최대한 친절하게. 자신 있게. 깔끔하게' 였기 때문에 2년간 일했던 어느 대학교의 기간제 교직원 자리에서 계약이 만료되어 일을 마무리 지을 때에는 수행했던 업무의 꼭지마다 (그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 할지라도) 표를 만들어 모든 것을 다 망라하는 인수인계서를 남겼고, 총 20페이지에 달하는 인계서에 마지막 서명을 할 때에는 스스로 보람을 찾기도 했다. 업무인수인계서가 아니라, 업무의 사전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자세한 서류를 작성하면서 나 스스로 얼마나 뿌듯하고 보람이 있었던지.
그리고 잘 쓰인 이십여 장의 문서를 수차례 다시 확인하며 '내 다음 사람은 분명히 시행착오 없이 일을 잘할 수 있을 거라'는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 뿌듯했던 감각이 아직도 새록새록 손 끝에 서려있는 느낌이다.
그래. 모두 다 나 같을 줄 알았지. 전임자란 자고로 웬만해서는 친절할 줄 알았지.
나다음으로일을 수행하는 사람이 더 편했으면 하는 마음. 당연할 줄 알았다.
언젠가 한 번은 a4 한 페이지가 안 되는 업무인수인계서를 받은 적이 있었다. 중요한 파일이 '내 컴퓨터' 어디에 저장되어 있는지만 나열한 그 반페이지짜리 인계서는 나로 하여금 큰 불안함과 무능에 빠지게 했고, 사실 아직도 그 업무를 어떻게 했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 내 주변 옆사람과 그 옆사람이 많이 시달렸겠지. 질문을 쏟아내는 내가 답답했을 터고,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비슷한 질문을 반복하는 것 말고는 당장 할 수 있는 것이 없던 나도 참 마음이 힘들었던 시기였을 것이다.
그래서 몇 번을 썼다가 지웠다가를 반복했다.
추진하던 업무를 마인드맵 형식으로 펼쳐놓고, 핵심 단어들을 연상해 가며 가지 치기를 시작했다.
그러면서도모든 것을 다 알려주자니,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듯 한 느낌이었고,
수박 겉핥기식으로만 심플하게 가자니, 마음이 편치가 않았다.
동일한 업무를 수행하더라도 개인마다 방법과 스타일의 차이가 있을게 분명하고, 내가 했던 방식이 정답도 아닐 텐데 내가 뭐라고.
그래서 썼다가 지웠다가를 또 반복했다.
말로는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조리 있어 보이도록 글로 쓰기참 애매한 것들이 많았다. 어느 선까지 공개(?) 해야 하는지에 대한 구분도 모호했다.
연애편지를 쓸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회사를 생각하는 내 마음이 차가워지기를 바람에도 불구하고 나는 또 어느새 뜨거워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