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으로 나왔다. 감기 몸살로 이틀 동안 집에 있었더니, 갑갑하고 머리도 아프고 햇살도 바람도 그리워진다. 주말에는 집에만 있어도 아무렇지 않은데 아파서 집에 있으면 더 밖에 나가고 싶어 진다. 열도 견딜 만큼 내리고 기운도 돌아온 듯해서 밖으로 나가도 무리는 아니다. 날씨에 비해 더 두꺼운 옷을 입고 얇은 손수건을 목도리 삼아 목에 둘렀다.
집안에서 느꼈던 햇살보다 더 따뜻하고 화창하다. 창문을 넘어 들어온 햇볕과는 느낌이 다르다. 밖에서는 시원한 바람과 맑은 하늘도 함께하기 때문일 것이다. 잠깐 걷는 것으로도 기분이 바뀌면서 조금 더 멀리 가고 싶어 진다. 공유 자전거를 탄다. 사는 곳이 시 외곽이라 걸어서는 무리지만 자전거로는 힘들이지 않고 갈 정도로 가까이에 논이 있다. 가끔 가서 익숙해진 논이다.
논은 단 하루도 같은 모습으로 머무르지 않았다. 겨울 철새들이 먹이 활동을 하고 번식지로 떠나고 봄부터 벼가 자라 수확이 끝난 지금은 벼 밑동만 줄지어 촘촘히 남아 있다. 일찍 벤 밑동에서는 벼가 한 뼘이 넘게 다시 자라서 벼 이삭이 드문드문 올라올 정도다. 물이 차서 들어갈 수 없던 논이었는데 지금은 물이 빠져 신발에 흙을 묻히지 않고도 걸을 수 있다. 벼 밑동을 밟으며 걸어본다. 방향을 바꿔가며 하나씩 골라 발을 옮기다 보니 어느새 논 가운데를 건너 반대편에 와 있다. 이쪽으로 와서 보니 햇살 방향이 바뀌어 건너편에서 보는 논을 둘러싼 풍경은 또 다른 모습으로 변한다.
매일 그리고 순간순간 변하는 논을 가까이서 볼 수 있는 논길 걷기가좋다. 봄이나 여름에는 그늘이 있는 숲길이 좋고 볕이 약해지는 가을에는 논두렁 걷기도 숲길에 못지않다. 겨울에는 눈이 오면 아무도 걸어간 흔적 없는 눈길이 되고 봄이 멀지 않은 화창한 날엔 양지바른 논둑에서 때 이른 꽃을 만나기도 한다.
지금은 늦가을 오후다. 겨울을 가까이 앞두고 있어도 논길에서 꽃을 만날 수 있다. 몸이 온전치 않은데도 여기까지 자전거를 타고 온 이유이기도 하다. 늦은 봄부터 꽃을 피웠던 주름잎은 지금도 더러 꽃을 피운다. 꽃 피는 기간이 이른 봄부터 늦은 가을까지 비교적 길다. 잎에 주름이 있어 주름잎이라는 이름을 얻었고 습기가 많은 곳을 좋아하며 비교적 흔하다.
미국가막사리도 늦은 꽃을 피운다. 다른 개체들은 이미 열매를 맺고 갈고리가 달린 씨앗을 퍼트리고 있다. 추위가 몰려오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서둘러야 한다. 까마중도 논길 옆에서 낮은 키로 꽃을 피운다. 농사 중에 한두 차례 논두렁의 풀베기를 하는데, 그때 잘려 나갔어도 기특하게 줄기를 뻗어 결국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었다.
<주름잎, 미국가막사리, 까마중>
논둑 아래 도랑에는 농사철에 농부의 물 걱정을 덜어주던 물이 느리게 흐른다. 분주하게 흘렀던 여름을 뒤로하고 게으르게 흐르며 쉴 수 있는 가을을 반기듯 보인다. 작은 물고기도 한가롭긴 마찬가지다. 추위가 닥쳐오면 물은 더 느려지고 마침내 얼음이 되어 움직임을 멈춘다. 그러면 물고기는 무엇을 할까. 물이 쉰다고, 논이 쉰다고 함께 쉬지는 않을 것이다.
도랑을 이루는 논둑 경사지에는 들국화가 가을 햇살에 환하다. 들국화에 찾아온 나비는 날이 갈수록 해가 짧아지면서 겨울 준비에 바쁘다. 이 꽃 저 꽃 옮겨 다니며 꿀을 빨고 있다. 암끝검은표범나비 암컷과 수컷이 노란 산국꽃에 앉았다가 연보라 쑥부쟁이꽃으로 옮겼다가 서로 눈치 보며 꽃을 바꿔가며 나풀거린다. 겨울이 오기 전에 알을 낳고 애벌레로 월동하려면 눈치 살피기에 빠듯한 시간이다.
잎도 줄기도 열매도 붉게 물들어 익어가는 여뀌에는 이름 모를 애벌레가 입에 든 뭔가를 씹으며오물거린다.해를 가리고 바람을 일으키고 여뀌 줄기를 살짝 움직여훼방을 놓아도 몸은 여전히 굼뜨다. 더 위협적인 행동에는 무슨 반응을 보이는지 장난을 쳐보려다 그만둔다.
<산국과 쑥부쟁이 꽃을 쫓는 암끝검은표범나비 암컷과 수컷, 여뀌에 앉은 애벌레>
논두렁 길을 걷다 보니 어느덧 해가 기울어 간다. 약 기운이 다해 가는지 한순간 몸이 부르르 떨리며 진저리 친다. 조금 더 이른 시간에 나올걸 후회하면서도 바깥나들이로 하루 더 몸살이 길어지더라도 나오길 잘했고 내일 또 나오고 싶다. 돌아오는 길에서 노란 산국이 보여 몇 송이 꺾어와 화병에 꽂아 두었다. 꽃이 시들 만큼 시간이 흐르고 글 쓰는 지금은 회복되어 몸도 가볍다.또 나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