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늘 통도사애 간다(3)
- 통도사 무풍교가 어디있지
이병길(지역사 연구가)
통도사 산문을 지나면 첫 번째 만나는 것이 무풍교(舞楓橋)입니다. 남창도감과 전결도감을 역임한동계(東溪) 윤재형(尹載衡, 1812~1871)은 ‘무풍교’라는 시를 남겼지요.
가을 서리 일만 골짜기 단풍 다 물들이니,
춤추며 까부르는 바람 앞에 모두가 붉은 빛이네.
해 지면 노는 용이 강물 위에 보이고
산 높아 수리 깃들고 동녘 하늘로 내려 꽂히네.
안개 낀 잔도 위태로운데 사문은 가깝고,
돌기둥 선 통도사는 불경에 통달하네.
천년 동안 이 다리, 흘러 옮기지 않고
밤에는 초승달 굽기가 활과 같네.
그런데 다리가 보일까요. 다리에는 분명 이름표가 달려있는데 보이지 않아요. 다만 우리가 산문을 들어서서 첫 번째 하천을 건너는 도로가 실상은 다리입니다.
다리를 놓은 공덕이 으뜸이라
하천은 걸음을 멈추게 합니다. 다리가 없다는 우린 주저하며 건너지 않거나 바지를 걷어부치고 물 위를 아슬 위태하게 건너가겠지요. 다리는 이쪽과 저쪽을 연결시켜주며, 이 세계와 저 세계, 이 사람과 저 사람의 만남을 이어주는 참으로 좋은 것입니다. 오작교가 없었다면 견우와 직녀가 만날 수 있었을까요. 무엇보다도 다리는 건너기 위해 존재하지요. 이곳에서 저곳으로 가는 것이지요. 종교적으로 이 언덕인 차안(此岸)에서 저 언덕인 피안(彼岸)으로 가는 것이지요. 그것은 또 속계(俗界)에서 진계(眞界)로 감이요, 미혹 중생에서 해탈 여래의 세계가 되는 것입니다.
다리는 인과 연을 이어주고 만나게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건너감으로 그것을 잊어야 합니다. 잊지 못하면 과거를, 차안(此岸)을, 그 사람을, 그 존재를, 세속세계에 계속 얽매이게 될 것입니다. 집착은 고통입니다. 그래서 강을 건너고 난 뒤에 배는 버려야 한다고 하지요. 속세의 모든 것을 그 배에 실어놓은 채, 배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배는 건너는 역할을 해야 하지 그 배를 가지고 또다른 세계를 가는 것은 아닙니다. 버릴 것을 버리지 못할 때 우리의 삶의 무게, 고통의 무게, 집착의 덩어리는 더욱 무거워 질 것ㅇ비니다. 다리를 건널 때 우리는 한시름을 덜어놓고 가야겠지요.
절 입구에 흔히 있는 다리는 현실적인 필요 이외에 부처님을 만나러 가는 세상을 구현하려 한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수많은 공덕 중에서도 다리 놓는 공덕을 크게 친다고 합니다. 그것은 한 번의 투자로 수많은 사람이 고맙게 여기고 감사함을 느끼게 하는 것이므로, 그 다리가 버티고 있는 한 그곳을 지나는 사람들로부터 공덕을 받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작은 개울을 지나도 이러한데, 큰 강과 계곡을 건널 때 그 고마움은 어떻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단순히 볼일을 보러 건너는 다리가 아니라 이상향을 향해 가는 해탈교를 조성하는 것은 사람뿐만이 아니라 모든 중생이 건너야 하는 다리임을 생각해 볼 때 실로 다리에 투자할 가치는 무한하다 할 수 있습니다. 아무도 그 시주한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여도 우리는 다리를 건너감으로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기에 그 사람의 공덕은 영원한 것입니다. 다리를 건넘으로 해탈에 이르게 한다면 그 공덕은 무엇보다도 큰 것일 것이다.
불교에서는 우리가 사는 세계 가운데에 수미산이라는 산이 있고 이 주위에 여덟 개의 바다와 산이 있다고 합니다. 이를 일러 구산팔해(九山八海)라고 해요. 부처님이 사시는 궁전인 수미산 꼭대기에 오르려면 나그네는 산과 바다를 건너야 하는데, 사찰입구에 가면 거의 물을 가로지른 다리가 있음을 보게 됩니다.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사찰들은 대부분 산 속에 있으며, 또한 자연적으로 흐르는 계곡을 끼고 있는 경우가 많지요. 한번은 계곡물을 건너는 다리를 넘어가야 합니다. 절 초입에 놓인 다리는 인간이 살고 있는 현실의 세계와 진리의 땅인 피안정토를 구분하는 경계이자, 그 두 세계를 이어주는 통로로서의 기능을 갖고 있는 것이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해탈교, 극락교, 열반교 등등의 이름을 붙여 놓고 있지요. 전국 유명 사찰은 대부분 하천을 끼고 있음은 바로 이런 까닭이 아닐까요. 때로는 그 기능과는 상관없이 다리의 숫자를 여덟바다를 건너기 위해 여덟 개로 맞추어 놓은 곳도 있습니다.
바람이 춤추는 무풍교
통도사에서 첫 번째 만나는 다리인 무풍교(舞風橋)는 춤출 무(舞), 바람 풍(風), 바람이 춤추는 다리(橋). 바람이 춤추는 곳에 세워진 다리입니다. 무풍교는 통도천의 계곡 따라 부는 바람과 지산마을에서 부는 바람이 만나는 곳에 새워졌습니다. 또한 두 지역의 물이 합하는 곳이라 풍수적으로도 중요한 곳이지요. 두 지역의 다른 기운이 만나 춤추는 바람을 만들었는가 봅니다. 그러나 지금은 다리이지만 그곳이 다리인지 모른 채 지나갑니다. 이름표가 없어서입니다. 그것은 애초에 있었던 좁은 다리를 도로같이 확장했기 때문입니다. 통도 하천을 건너는 차도를 1990년 만들면서 그 이름을 무풍교라 했기에 예전 다리는 이름도 빼앗겨서 무명교가 되었습니다. 이름에 집착하는 것도 참 고통이지요. 옛 무풍교 석표와 1972년 8월 11일 확장 중수 사실을 기록한 표석은 현재 부도원 왼쪽 길옆에 가지런히 누워있습니다.
옛 무풍교는 아치형 돌다리였습니다. 예전의 다리는 요즘같은 직선형이 없었습니다. 무지개다리를 만들었지요. 1980년대 무풍교 사진을 보면 지금의 산문도 없고 거칠 것 없는 바람이 춤추며 부는 곳에 소나무들이 무용수처럼 서 있습니다. 무풍교는 규장각 소장의 1899년 고지도에도 그 이름이 등재되어 있을 정도로 유명했어요. 무풍교의 옛 멋을 알려면 옛 흔적이 남아있는 다리의 아래쪽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지만 옛 사진만큼의 시원함은 없어요. 그래도 아치형 모양 다리와 소나무 그리고 암반 위를 흐르는 물의 조화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무풍교는 언제 세워졌을까요. 옛 무풍교 끝자락 정면, 길가 자연석에 글자들이 세로로 14행 새겨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원래는 사람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지만, 바위 면을 사각형으로 깎아내고 다시 새긴 듯하네요. 무풍교 석축 기증의 내용을 적은 것입니다. 한번 읽어볼까요.
“무풍교(舞風橋) 석축(石築) 기증(寄贈)/ 무오갑(戊午甲) 금육백원(金六百圓)/ 갑자갑(甲子甲) 금이백원(金二百圓)/ 경오갑(庚午甲) 금일백원(金一百圓)/ 종계중(宗契中) 금일백원(金一百圓)/ 서청중(書廳中) 금오십원(金一百圓)/ 본사중(本寺中) 금육백원/ 감역(監役) 무오갑원(戌午甲員) 김용성(金龍惺)/ 불기(佛紀)이천구백사십구년(二千九百四十九年)/ 대정(大正)십일년(十一年) 추(秋)구월일(九月日)/ 통도천년사(通度千年寺) 무풍만세교(舞風萬歲橋) 등산임수객(登山臨水客) 원학반소요(猿鶴伴逍遙)/ 김구하(金九河)”
무풍교를 돌로 쌓았는 데 당시 통도사에 있었던 무오갑계원, 갑자갑계원, 경오갑계원, 종계 스님, 서청담당 스님, 통도사 스님 등이 합심하여 1,650원을 모아 한 것입니다. 건축 시기는 불기(佛紀) 2949년, 대정 11년 가을 9월, 즉 1922년 9월이다. 끝에는 <풍교경설음(舞風橋更設吟, 무풍교 다리를 다시 건설하며)> 시가 한 수 적혀있지요. “통도사는 천년의 오랜 절이요/ 무풍교는 만세에 전하리라/ 산을 오르고 물에 머무는 나그네/ 자연과 더불어 한가로이 노니는구나” 무풍교 석축 공사는 김구하스님이 통도사 주지로 있을 때 세운 것입니다.
그런데 시를 보면, 신도가 아니라 산을 오르고 물에 머무는 나그네, 즉 통도사를 찾아온 풍류객을 위한 것 같네요. 굳이 신도용이 아니라는 말이 다리를 건너는 사람에게 편안함을 주네요.
무풍교에서 만난 관음보살 여인
그런데 이 무풍교 근처 내려오는 옛 이야기가 있습니다. 『삼국유사』에 보면, 신라 경덕왕 때 양산의 포천산(천성산 혹은 정족산) 자연 석굴(양산 미타암?)에서 비구 다섯 명이 머물면서 아미타불을 염송하며 극락을 구했습니다. 거의 10년이 되었는데, 갑자기 보살들이 사방으로부터 와서 그들을 맞이하였습니다. 그러자 다섯 비구가 각기 연화대에 앉아 공중으로 올라가더니 통도사 문 밖에 머물렀지요. 그러자 하늘에서 음악을 연주하는 소리가 들렀습니다. 통도사 승려들이 나가보니 다섯 비구가 인생이 무상하고 괴롭고 허무하다는 이치를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유해(遺骸)를 벗어버리고 큰 빛을 발하면서 서쪽을 향해갔습니다. 유해를 버린 곳에 스님들이 정자를 세우고 치루(置樓, 유해를 버린 곳)라 이름했는데 지금도 남아있다는 내용입니다.
이 이야기의 ‘치루’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아마 무풍교 아래의 너럭바위일 가능성이 높다. 하여 제가 정자 자리를 찾아보았더니 신라 때인지는 모르지만 1칸짜리(200×170cm) 정자 초석이 있더군요.
통도사에 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져오고 있습니다. 우운대사(友雲大師, ?~1694)가 임진왜란 때문에 40여 년간 폐허가 된 대웅전 중창의 서원(誓願)을 가지고 시주를 걷기 위해 산문을 나섰다고 합니다. 산문 입구 무풍교에 이르자, 빨래하던 여인이 대사를 보고 반가워하며 느닷없이 보따리 하나를 주면서 말하기를, “이것을 가져가야 스님의 소망이 성취한다.”고 하였습니다. 그 자리에서 다시 절로 되돌아와 며칠을 더 기도하다가 우운대사는 통영으로가 수군 통제사를 만났습니다. 통제사는 거액을 시주하였고, 진주목사와 6방 관속들도 모두 시주에 참여하였습니다. 그래서 우운당 진희(眞熙)대사는 1644년(인조 22) 통도사 본사의 대웅전을 중건하였고, 6년 뒤인 1650년(효종 1)에 통도사의 대웅전을 짓고 남은 돈으로 대사가 취운암을 창건하였다고 합니다. 또 스님은 대웅전과 금강계단의 중건하고, 불교 경전을 간행하고, 법당 불기를 제작하고 통도사 역사를 적은 사적약록(事蹟略錄)의 완성까지 임진왜란 이후 폐허화된 사찰을 복원하였습니다. 스님은 창건주 자장스님에 이은 2번째 창건주라고 할 수 있습니다.
통도사의 스님들은 우운대사가 무풍교에서 만난 여인이 관음보살의 화신이며, 불보살의 도움 을 받아 중창 불사를 이루어냈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무풍교를 지날 때에 만나는 사람 모두 보살로 반갑게 만나 인사할 일입니다.
무풍교 아래 너럭바위에는 통도사를 최근세에 중흥한 구하 스님의 “流水千年通度寺(유수천년통도사) 落花三月舞風橋(낙화삼월무풍교) 천년동안 물 흐를 통도사요. 삼월에 꽃 떨어지는 무풍교라네.”라는 글씨가 물 흐르듯 바위에 새겨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