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드민턴 토너먼트장에서의 생각 11
사람은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하고 살까?
토너먼트장에 앉아 노트를 펴고 메모를 시작했다.
하루 동안 스쳐간 무수한 생각 중 23개가 노트에 담겼다. 잊힐 수밖에 없는 생각은 그렇게 박제되었다. 그중 일부를 다시 글로, 붙잡아 두기로 했다.
아이의 토너먼트 팀에는 '이샤'라는 친구가 있다. 마르고 길쭉한 인도 여자아이. 이 아이는 늘 웃고 있다. 심지어 경기를 하면서도 웃는다. 잘해도 웃고, 못해도 웃는다. 토너먼트장에서 이샤 엄마와 나란히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나의 마지막 질문은 "이샤는 언제부터 배드민턴 한 거야?"였다. 조심히 물었다. 그 앞에 '실력이 늘지 않는 것 같은데'가 빠진 걸 알아채기라도 할까 봐.
우리 집 큰아이는 휴스턴으로 이사 온 21년 8월에 배드민턴장에 처음 갔다. 통통과 퉁퉁 사이의 몸을 하고 열심히 라켓을 휘둘렀던 기억이 난다. 아이는 욕심이 생겨 그로부터 1년 뒤, 22년 여름에 토너먼트 팀으로 들어갔다.
실제 토너먼트에 참가한 건 23년 1월, 4시간 거리에 있는 달라스가 처음이었다. 그때 아이의 실력은 아마도 대회에서 최하위였을 거다. 미국에 이렇게 배드민턴을 하는 아이들이 많은지도 몰랐고, 국가대표 저리 가라 진지한 아이들의 모습에 충격을 받았더랬다. 게다가 하나같이 잘하는데, 이거 계속 시키면 늘긴 하나 머리가 복잡했다.
그 뒤로 아이는 많이 늘었다. 실력이 점프하는 게 눈에 보였다. 늦게 시작했지만, 잘 따라잡고 있었다.
하지만 이샤는 아니었다. 큰애가 처음 배드민턴장에 갔을 때부터 토너먼트 팀에서 활동했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큰 차이가 느껴지지 않았다. 물론 내가 부모는 아니니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이샤를 앞지르는 아이들이 점점 많아졌으니까.
"이샤는 5년 됐어"
"아~ 그렇구나" 대답 뒤로 살짝 당황한 내 감정을 숨겼다. 생각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5년이면 4학년부터 시작한 건데, 왜 아직도 이 정도밖에 못하지?'
'왜 실력이 느는 게 잘 보이질 않을까?'
'소질이 없는 건가...'
'나라면 계속 지원해 주기 어려웠을 것 같은데, 대단하네'
그 이후로 이샤를 관찰하게 됐다. 이 아이가 궁금해졌다.
자세히 보니 이샤가 못하는 건 아니었다. 보통은 그렇다. 하지만 다른 애들에 비해 떨어지는 게 하나 있었다. 바로 공에 대한 집착. 이샤는 끝까지 받아내는 성격이 아니었다. 이샤는 한 번도 공을 받기 위해 넘어진 적이 없다.
맥스라는 남자아이는 키가 작다. 처음 봤을 때는 제 나이보다 3살은 더 어리게 봤는데, 8학년이 된 지금은 4학년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 작은 녀석은 단점을 극복하기라고 하려는 듯 팀에서 누구보다 높이 점프하는 아이다. 맥스는 공이 날아오면 달리고, 필요하면 슬라이딩을 하며, 끝까지 받아낸다. 그러려고 한다. '받을 수 있을까?' 생각 자체를 하지 않는 것 같다. 몸이 먼저 반응한다. 이 아이는 넘어지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다.
가만 생각해 보니 첫째의 실력이 는 것도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저건 내가 받을 수 없는 공이지'라는 자세로 가다가 포기해 버리던 아이가, '받아내고 말테야'라는 눈빛으로 달리고, 몸을 날리면서부터.
이샤는 끝까지 뛰질 않는다. 뛰면 충분히 받을 수 있는데, 가다가 속도를 늦춘다. 그러다 받지 못하면 민망해서 웃어버린다. 파트너가 화내도 웃는다. 이게 이 아이의 벽이었던 것 같다. 실력이 점프하는 높은 계단 아래에 그대로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는.
사실 둘째도 그 벽 앞에 서있다.
올 1월에 처음 토너먼트 팀에 들어갔으니 오래 한 건 아니지만, 늦게 시작한 만큼 나는 조급하다. 더 힘이 세고, 더 잘하는 형 앞에서 늘 기가 죽어있다. 빨리 점프하고, 동생을 놀려먹는 형을 눌러버리면 좋겠다는 게 내 마음이다.
한 번, 아이가 딱 한 번만 끝까지 악바리처럼 받아내면 좋겠다. 넘어져주면 좋겠다. 자동으로 올라가 주는 에스컬레이터 따위는 없다. 스스로 올라가야 한다. 그 딱 한 번이 중요하다. 그걸 해내지 못하면 이 아이도 이샤처럼 계단 아래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너무나 높아 벽처럼 느껴지는 계단 말이다. 다른 게 아무리 늘더라도 그걸 해내지 못하면 그 계단은 오르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