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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백 Jul 23. 2023

중국 고속버스 휴게소에서 차를 놓치면 생기는 일

 베이징에서 유학하는 대학생이었던 나는 옌타이에 무술도복을 만들기 위해 고속버스를 타고 가고 있었다. 오후 녘 출발해 다음 날 새벽에 도착하는 차였다. 쌀쌀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늦가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3~4시간을 달려 휴게소에 내렸는데 볼 일을 보고 밥을 먹는 사람도 있었다. 간이 휴게소의 화장실은 정말로 문이 없고 밑만 뻥 뚫려 있었다. 당시에 베이징에서도 보기 힘든 재래식 화장실이었다. 사람들이 웅성대는 동안 나는 담배를 한 대 물고 잠시 멍을 때리고 있다가 버스가 있는 자리로 돌아갔는데, 버스가 있어야 하는 자리에 아무것도 없었다. 한 바퀴 돌 것도 없이 한눈에 다 보이는 작은 휴게소였다. 고속버스가 나를 놓고 간 것이다. 내 짐, 휴대전화, 지갑 모두 차에 있었는데! 나는 맨 몸으로 담배 한 갑만 지닌 채 덩그러니 휴게소에 남았다. 휴게소의 작은 샤오마이부(옛날식 중국 슈퍼)에는 사람이 세 명 정도 있었는데 내 상황을 설명하고, 버스를 놓쳤는데 어떡하면 좋냐고 물었지만, 방언이 너무 심한 그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저 ‘왕왕왕왕왕왕’ 하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휴게소에서 한 시간을 넘게 기다린 것 같다. 벌레 새끼 한 마리 지나가지 않았다. 고속버스는 고사하고 승용차 한 대 오지 않는 것이었다. 그 휴게소에서 그대로 다음 버스를 기다렸어야 했는데, 다음 날 옌타이에서의 미팅에 차질이 생길까 봐 마음이 급해진 나는, 앞으로 가보면 뭐가 나오겠지 싶어 걸어 나갔다.

 그게 지옥의 시작이었다.


 몇 시간을 걸었는지 모르겠는데, 걷다 보니 꽤 쌀쌀한 날씨였는데도 땀이 났다. 걸어도 걸어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한두 시간 걸으면 사람 사는 마을이 나오겠지 했는데 아무것도 없었다. 뒤로 돌아갈 수도 없고 앞으로만 가는데 점점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해가 지고 있었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생각을 했다.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갈 것인가. 하지만 뒤로 돌아가 보았자 간이휴게소의 문이 일찍 닫혀 있을 확률이 더 컸다. 어쩔 수 없이 앞으로 갔다. 해가 완전 지고 별이 뜨기 시작했다. 사방 천지를 둘러보아도 가로등 하나 없이 검었다. 핸드폰도 없고 손전등도 없었지만 하늘에 떠있는 별이 정말 많았다. 별빛에 의지해 밤길을 재촉했다. 나는 원래 별 보는 걸 정말 좋아하는데 그날 촘촘히 떠있던 별은 정말 공포스러웠다. 잘못하면 별나라로 가겠구나 싶었다.     


 나는 시력이 매우 좋은 편이고, 밤눈도 밝은 편이다. 덕분에 아주 멀리서 걸어오는 두 명의 행인을 일찌감찌 발견할 수 있었다. 덩치로 봐서는 성인 남자 둘인 것 같았다. 잘못하면 큰일 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도일 수도 있는데 내가 가진 건 없고, 삥 뜯을 게 없으니 나에게 남은 건 내 몸뚱이뿐이었다.  

 마침 여행을 떠나기 얼마 전 두한 형 친구가 여행 갔다가 실종이 된 일이 있었다. 당시 중국에서는 인간돼지 이야기가 떠돌고 있었고, 실제로 몇 해 전 오도구 화청가원 아파트에서 한국인 유학생 두 명이 배가 갈린 채로 쓰레기통에서 발견된 일도 있었다. 긴장한 나는 주변을 둘러보고 작은 막대기 하나를 주웠다. 똥개도 지 집 앞에서 싸운다고, 저 행인들은 최소한 저녁밥도 먹었을 것이고 튼튼할 거 아닌가. 나는 그때 길을 잃은 지 5~6시간이 경과했을 때였으므로 정신이 피폐해져서 이미 정신력으로 상대방들에게 진 상태였다. 과연 2:1로 싸우면 이길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주먹을 불끈 쥐고 지나치는 사람들을 경계했지만 순박한 시골 사람들은 내 쪽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냥 지나쳤다.


 고속도로를 따라 걸을 수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다닐만한 임도나 오솔길을 찾아 걸었다. 도로로만 다니면 아무것도 안 나올 것 같아서 샛길을 선택했는데, 샛길을 한 번 들어가면 한 시간 동안 빠져나오질 못했다. 이놈의 땅은 뭐가 그렇게 넓은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물론 제대로 갔다면 뭐라도 나올 수도 있었겠지만 나는 길을 잃고 헤매는 중이었으니까. 쉬었다 걸었다 하며 체력을 아꼈다. 밤새 걷다 보니 동이 텄다. 너무 배가 고팠고 기력이 떨어졌다. 뭐라도 있으면 훔쳐 먹기라도 했는데 논밭이 하나도 없었고 개간이 안 된 황무지만 텅텅 비어있었다. 집도 하나 없고 나무도 없고 흙밖에 없는 곳을 사막 이후로 처음 경험했다.     


 체감 상으로는 일주일을 걸었지만, 밤낮 한나절 가까이 걸은 후 겨우 마을을 찾았다. 처음 만난 사람은 노인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노인이 아닌 40대 정도밖에 되지 않았을 수도 있는데, 관리를 따로 하지 않는 옛날 중국 시골 사람의 특성상 내가 노인으로 느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노인은 내 얘기를 대충 알아듣는 것 같았지만 나는 노인의 이야기를 30% 정도밖에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베이징에서 얼마 떨어지지도 않은 곳이었을 텐데 이곳 사람들의 말투는 왕왕왕왕왕왕 거리기만 했고, 내가 외국인이라고 봐주는 것 없이 자기들 하고 싶은 대로 아주 빠르고 길게 말했다. 마을회관 같은 곳으로 나를 끌고 간 노인은 사람들에게 길 잃은 한국인이 있는데 도와주자고 하는 것 같았다. 그러자 어떤 사람이 거짓말하지 말라고 했다. 한국 드라마에서 본, 자기들이 생각하는 한국인의 이미지가 있을 텐데, 당시 내 몰골로는 괴리감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땀으로 범벅되어 냄새나고 땟국물이 흐르는 나는, 어글리 코리안이 된 것 같아 몹시 불편해졌다. 


 동네 사람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100위안이 채 되지 않은 돈을 빌려 주었다. 당시 한국 돈으로 15,000원 가까이 되는 돈이었지만, 2000년대 초반, 중국 시골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큰 액수였다. 이보다 더 시골일 수 없을 것 같은 시골이었다. 방이라고 하나씩 있는 집인데, 이부가지들은 매우 더러웠고, 집에 전기는 들어오는데 수도가 들어오지 않았다. 마을 사람 모두가 동네의 공동화장실을 이용하고, 공동세면대를 이용하고 있었다. 물론 이런 곳은 당시 베이징에도 많았다. 이 와중에 푼돈을 모아 처음 본 낯선 이방인을 돕겠다고 나서는 그들의 마음이 너무나 고마웠다. 사람들은 나를 배부르게 한 끼 먹여서 보냈다. 그때까지 나는 중국음식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는데 그렇게 맛있는 중국 가정식 식사는 처음이었다. 기름에 볶은 야채 두어 가지와 쌀밥을 지어 줬던 것 같은데 꿀맛이었다. 마을 사람 중에는 베이징에서 일을 하는 사람이 두 명 있다고 했다. 나는 그들의 연락처를 받아둔 후, 꼭 가서 돈을 갚겠다고 다짐했다.


 사람들의 도움으로 베이징으로 돌아가는 기차 시간을 알아보고, 전화기를 빌려 학교에 있는 후배에게 사정을 했다. 

‘나 지금 죽을 지경이다. 완전 탈진했다. 곧 있으면 사망이다.’

 그렇게까지 엄살을 부리지 않으면 후배가 나오지 않을까 봐 조바심이 났다. 

 사람들이 알려준 대로 버스를 타고 기차역으로 가서, 베이징서역까지 무사히 도착했다. 기차는 2시간도 달리지 않아 금세 베이징서역에 나를 내려주었다. 가는 길에 창밖을 내다보니 군데군데 죄다 사람 사는 마을이 많이 보였는데, 나는 어쩜 그렇게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오랜 시간 빠져나오지 못했는지 모르겠다. 같은 길을 돈 것도 아닌데 억울한 마음도 들었다. 이렇게 나처럼 고속도로 중간에 잘못 내리면 아무것도 없으니까 절대로 버스를 놓쳐서는 안 된다.


 후배는 몇 시간째 기차역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했다. 휴대폰이 없는 내가 헤매면 자기가 욕먹을 게 뻔하니 그랬다고 했다. 세상에는 고마운 사람 천지다. 후배를 보고 빵차(무면허 임대 택시)에 몸을 실으니 피폐했던 정신이 어느 정도 차려지는 것 같았다.     

 나는 그 마을이 어딘지 모른다. 다시 찾아갈래야 찾아갈 수도 없을 것이다. 다만, 얼마 후에 베이징에서 일을 하고 있다는 마을 사람 두 명을 찾아갔다. 우리 학교도 베이징 외곽인 편인데, 그곳은 내가 있는 곳에서 차로 2시간 가까이 떨어져 있는 베이징 외곽이었다. 나는 빌렸던 돈과, 선물을 양손 가득 준비해 가서 전해 주었다. 내가 전해준 무거운 선물들로 양손이 가득 찬 그들은 이렇게 까지 할 줄 몰랐다며 엄청 고마워했다. 그들은 여전히 왕왕왕왕 거렸고, 나는 그들의 말을 거의 알아들을 수 없었다. 우리는 서로 “시에시에(고마워)” “시에시에”만 반복하다 “짜이찌엔(안녕)”하고 돌아 나왔다.


 길 잃은 이방인을 챙겨주던 그들의 마음에 지금도 고마운 마음이 든다. 그래서 간혹 한국에서 길을 잃거나 말이 안 통해 고생하는 외국인이 있으면 나는 웬만하면 먼저 나서서 도와주는 편이다. 그들에게 입었던 은혜를 이렇게라도 되갚아야 하기 때문이다.     


 길이 없는 곳에 길이 있다. 세상에 정해진 길은 없다. 이대로 가다가 잘못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종국에는 뭔가가 나오기 마련이다. 살면서 길을 잃는 순간을 무수히 많이 마주쳤다. 혼자 외로이 남아서 체력과 정신이 갉아 먹힌 적이 한두 번이 아니지만 어찌 됐든 앞으로 치고 나가야 한다.

 가다 보면, 길은 나온다. 


인터넷에서 찾은 옛날 우루무치 버스터미널인데, 내가 들렀던 휴게실은 이런 느낌의 훨씬 작고 낡은 곳이었다
2000년대 초반에 가서 경험하고 온 우리 나라 60,70년대와 같은 풍경들






신기방기한 일이 많은 백수건달 사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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