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늦여름, 우리 집에 온 하얀 겨울이
"겨울이처럼 정말 하얀 거 맞지?"
"그럼요. 같은 말티즈에요."
"딱 겨울이처럼 작고 귀엽고 예뻐야 돼."
"말티즈는 원래 다 겨울이처럼 예쁘게 생겼어요.
그런데 아버님, 너무 외모지상주의 아니십니까?
작고 귀엽고 예쁜 것만 찾으시고... 우리 아버님 안 되겠네."
"큰 건 정말 싫어! 겨울이가 얼마나 영리하고 예쁘다고...
콩알같이 까만 눈이 참 귀여워."
"우리 아버님, 겨울이한테 단단히 빠지셨네.
제가 겨울이랑 똑같은 말티즈 여자아이로 알아보고 있어요.
그러니깐 조금만 더 기다려보세요. 아셨죠?"
20대 마지막 무렵 결혼을 했다.
그리고 1년 후, 엄마가 자궁암으로 돌아가셨다.
하나뿐인 여동생마저 출가하여 스님이 되었다.
온 가족 오손도손 정겹게 지냈던 집에는
친정아버님 혼자 망부석처럼 덩그러니 남았다.
아무도 없는 집에 홀로 계실 아버님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반려견이라도 있으면 덜 적적하시겠다 싶었다.
어릴 적 마당이 있는 집에서
진돗개 캐리와 요크셔테리어 믹스견 아롱이를 키운 적이 있었다.
IMF때 은행을 그만 두신 아버님이 아롱이를 유독 살뜰히 챙기셨던 기억도 났다.
강아지를 안고 좋아하시는 아버님을 상상하며
코커 스파니엘 다롱이를 깜짝 선물해 드렸다.
그런데 불과 며칠 만에 다시 우리 집으로 데리고 오신 게 아닌가.
밤마다 낑낑거리는 통에 도저히 잠을 잘 수 없다고 역정을 내셨다.
아뿔싸, 미리 상의도 없이 덜컥 저지른 내 잘못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다롱이는 시름시름 장염을 앓다가
결국 무지개다리를 건너고 말았다.
그 후 아버님께서는 같은 아파트 단지에 있는 작은 평수로 집을 옮기셨고,
우리도 우연히 바로 앞집으로 이사하게 되었다.
한동안 잊고 있던 다롱이 얼굴이 떠올랐다.
아버님께서 2년 전부터 치매약을 복용 중이시고,
남매둥이 중 아들은 ADHD로 정서적 안정이 절실했다.
순한 아이로 한 마리 들이면 집안 분위기도 훨씬 부드러워지리라.
하지만 전에 안 좋은 기억도 있는 데다가
깔끔한 아버님 성격에 집 안에서 개를 키우는 건
두 번 다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걸 알고 있기에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는 못했다.
그러던 중 친한 어린이집 선생님께서
2주 동안 미국으로 가족 여행을 가시게 되었다.
개 맡길 곳이 없다고 걱정하시는 걸 보고는 이때다 싶었다.
그렇게 늦여름, 기적처럼 우리 집에 하얀 겨울이가 왔다.
첫날부터 몽글몽글 조짐이 보인다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겨울이를 향한 우리 아버님의 사랑은 눈덩이처럼 커져만 갔다.
매일 산책할 때마다 겨울이를 데리고 나가셨고,
지나가던 사람들이 예뻐서 눈을 못 뗀다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셨다.
게 눈 감추듯 삶은 고구마를 먹어 치우는 모습에 너털웃음을 터뜨리기도 하고,
애정 어린 눈빛으로 곤하게 자고 있는 녀석을 한참 바라보기도 하셨다.
아버님 댁에서 둘이 꽁냥꽁냥 깨 볶는 냄새가 우리 집까지 솔솔 전해졌다.
평소 이마에 끼룩끼룩 갈매기 그리며
폭풍 잔소리를 하시던 우리 아버님이 아니었다.
온통 겨울이 이야기로 못 말리는 수다쟁이가 되셨다.
표정도 한결 밝고 편안해 보였다.
이윽고 약속한 2주가 흘렀다.
선생님이 돌아오신 후로도 양해를 구해 이틀을 더 함께 보냈다.
그러고는 진짜 마지막 날이 되었다.
작은 생명체가 사라지자 아버님의 한숨도 잦아졌다.
우리 아버님, 드디어 넘어가셨다.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