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글은 작년 9월 중순부터 10월 중순까지 약 31일간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며 발행했던 뉴스레터 [From Santiago]를 공개하는 글 입니다. 1편부터 차례대로 읽어나가시길 권합니다.
Day 2. 론세스바예스(Roncesvalles) → 수비리(Zubiri) / 21.5킬로 / 6시간 22분
놀랍게도 순례자들 대부분의 고민은 ‘어떻게 하면 배낭 무게를 줄일 수 있을까?’다. 꼭 필요한 물품만 챙긴다고 해도 800킬로를 걷는 여정의 짐이 간단하기란 쉽지 않은 것이다. 일단 배낭 무게만도 1킬로가 넘으니까. 거기에 꼭! 챙겨야 하는 침낭, 경량패딩, 바람막이만 해도 제법 된다. 매고 걸을걸 생각하면 짐을 줄여야 하고, 필요한 걸 생각하면 마냥 줄일 수도 없는 거다. 게다가 배낭의 무게는 길을 걷는데 꽤 영향이 크다(걸어보고서야 알았다).
이런 상황을 잘 노린 비즈니스가 있다. ‘동키서비스’라고 불리는 것인데 순례자들의 짐을 그들이 가는 곳까지 옮겨주는 서비스다. 대충 하루에 걷는 20킬로 정도를 평균으로 잡아 한 구간에 6유로를 받고 내가 묵는 숙소까지 배낭을 미리 갖다 놔준다. 그럼 나는 에코백과 등산 스틱만 챙겨 아주 가볍게(내 몸만 해도 무거움) 걸을 수 있는 것이다. 한 번도 안 써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쓴 사람은 없다는 동키, 이번 여정의 효자템이다. 6유로가 뭐야 더 낼 수 있어... 내 짐은 9킬로니까...
이제 겨우 이틀 차, 오늘 수비리까지 걸으면서 마지막 4km 지점은 매우 힘겨웠다. 칼날과도 같은 긴 돌들로 이루어진 내리막길이었기 때문이다. 돌밭의 내리막길이라 위험하기도 하고 발목과 무릎에 충격이 많이 가는 길이다.
누군가는 아주 조심스레 내려오고 한국인들은 진짜 훅훅 내려온다. 정말이다. 축지법을 쓰는 것 마냥 돌산을 주르륵 가볍게 내려간다. 특히 어머님, 아버님들! 발놀림이 그렇게 가벼울 수 없다. 아 물론 이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니고.
힘든 길이다 보니 사람들의 속도차가 상당하다. 앞서가기도 하고 뒤로 처지기도 한다. 누군가는 자주 쉬어가고 누군가는 빨리 내려가서 쉬어야지 생각한다. 이 돌산을 자전거로 내려가는 순례자들도 있고(자전거로 완주하는 순례코스가 따로 있음). 특히 도착지점인 수비리는 작은 마을이라 머무를 곳이 많지 않고 공립 알베르게는 도착한 순서대로 침대를 배정해 주는 시스템이라 다들(사실 한국인만 급한 것 같지만) 마음이 급하다.
나도 마음이 급했다. ‘저 사람보다 빨리 걸어야지.’ 아무도 경쟁하는 이가 없는 그 길 위에서 나 홀로 경쟁하듯이 걷고 있었다. 더 잘 내려가야 할 것 같고, 더 빨리 가서 선착순 안에 들어야 할 것 같고... 나 스스로의 속도와 상태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말이다. 아무도 싸우지 않는데 나만 길과 싸우는 느낌. 게다가 동행이 있는지라 동행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았다. 심지어 동행이 나에게 그렇게 말하지 않았는데도.
마음을 가라앉히고 걸음을 숨 쉬는 리듬에 맞췄다. 그렇게 마주한 수비리. 공립 알베르게에도 무사히 짐을 풀었다. 무엇보다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은 나를 맞이해 줬고, 나도 뒤에 오는 사람들을 맞이했다. 몇몇의 한국인들을 만나 가지고 있던 라면도 나눠 받고, 마트에서 음식을 사서 같이 해 먹고 서로 몰랐던 얘기도 나눴다.
이 길은 앞으로도 700km가 넘게 남아있다. 길 위에 올려진 모두는 자기만의 속도가 있다. 빠르든 느리든 함께 걷는 사람들이 있기에 내가 나만의 속도로 갈 수 있는 것임을 깨달았다.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고, 내가 기다려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래서 어느 지점에서 함께 누릴 수 있는 기쁨이 있다는 건 꽤 풍요로운 삶이라는 거다. 우리들의 인생은 이 길보다 더 길겠지. 타인의 속도나 방향에 좌절하지 말자. 속도나 방향이 인생의 나음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인생을 길고 크게 본다면 서로의 리듬이 있기 때문에 함께 할 수 있는 삶도 분명 존재한다는 것을 잊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