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영 Feb 14. 2024

03. 순례길에 오르던 첫날

(feat. 론세스바예스)

본 글은 작년 9월 중순부터 10월 중순까지 약 31일간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며 발행했던 뉴스레터 [From Santiago]를 공개하는 글 입니다. 1편부터 차례대로 읽어나가시길 권합니다.




Day 1. 생장(Saint Jean Pied de Port) → 론세스바예스(Roncesvalles) / 24.2킬로 / 7시간 소요




무언의 약속, 부엔 까미노 Buen Camino

순례길에는 몇 가지 무언의 약속이 있는데 그중 하나는 '부엔 까미노(Buen Camino)!'라는 인사말이다. '부엔(Buen)'은 '좋은'이란 뜻이고 '까미노(Camino)'는 '길'이란 뜻이니 좋은 길이 되라는 응원이다. 이 약속 앞에서는 국적도 인종도 나이도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전 세계의 사람들이 이 길 위에서는 평등하다는 것이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를 떠나 지금 이 길을 걷는 우리들의 삶만이 여기 실재하고 있다는 깨우침이기도 하다. 이 길을 걷는 서로의 삶을 따스히 바라보게 되는 마법 같은 약속이 아닐까? 그러니 응원한다. 지금 어디에서 어떤 삶을 살든지 그대들의 좋은 길, 실재하는 매일의 순간을.




프랑스 국경을 넘어 스페인으로

생장 알베르게 앞에서 출발 전

새벽 6시 반, 가장 험난하다는 피레네 산맥으로 출발했다. 오늘 걸어야 하는 거리는 약 26킬로, 해발 1,427미터 지점까지 쉬지 않고 오르막길이 계속되는 코스다.


숨이 넘어갈 듯 끝없이 펼쳐진 산맥을 오르고 있자면 앞서 가는 사람들이 절로 부러워진다. 나는 언제 저기까지 가나 싶고, 오르막은 언제 끝날까 싶은 생각이 머리를 스쳐간다.


그러다 문득 뒤를 돌아보면 힘들게 지나온 길들이 아주 아름답게 펼쳐져 있는 거다. 결국 나 스스로 걸어온 그 길이. 사는 것도 비슷하다. 타인이 오르는 길은 마냥 부러워 보이고 내가 오르는 길은 힘들기만 하다. 내가 걸어왔다는 사실이 사라지지 않는 그 길 역시 아름다운데도 말이다.


그들에겐 그들의 길이 있고, 우리에겐 우리의 길이 있다. 각자의 길을 잘 걷고 있는 나에게 좀 더 너그러워져도 괜찮다. 지금까지 잘 걸어왔다고.



돌이켜보면 항상 나는 나를 힘겨워했다. 나에게 더없이 가혹했고 잘하는 건 당연하지만 못하는 건 견딜 수 없어했다. 어떻게든 더 잘해야만 했고,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만 했다. 그 사이 점점 마음은 지쳐만 갔고 그런 나를 돌보기는커녕 채찍질하길 십수 년. 몸은 경직되어 있었고, 정신은 피로했으니 힘겨운 게 당연했는데. 애쓰며 걸어온 시간을 스스로 보듬어 주지 못하는 일은 너무 아픈 일이다. 아픈 걸 안다고 해서 한순간에 가혹한 나로부터 자유로워지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나를 더 해하지는 않고 있다. 그리고 계속해서 말해주려 한다. 지금까지 잘 걸어왔고 잘 걷고 있다고.



Post Card

피레네 산맥 초입, 마주한 일출
2시간쯤 걸으면 나타나는 ‘오리손(Orisson)’ 마을의 Bar
걸어온 산맥 길을 바라보며 먹는 또르띠야, 생 오렌지주스, 커피
(평탄한 것 같지만) 피레네 산맥 한가운데 제법 가파른 경사


피레네 산맥 중간에 수많은 양들과 바람

피레네 산맥에는 양이 엄청 많은데 고도에 상관없이 저렇게 풀을 뜯고 돌아다닌다. 목동이 있다고 하는데 걷는 7시간 내내 본 적은 없다. 게다가 산맥에 나무가 없어 바람이 미친 듯이 분다. 정상까지 가면 바람에 몸이 휘청거려 걷기도 어렵다. 이 날 바람에 온몸이 너덜너덜.


이전 02화 02. 순례길의 시작, 생장에서의 하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