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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영 Feb 07. 2024

01. 산티아고에서 보내는 편지

에필로그


본 글은 작년 9월 중순부터 10월 중순까지 약 31일간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며 발행했던 뉴스레터 [From Santiago]를 공개하는 글 입니다. 




Camino de Santiago


산티아고 순례길은 스페인 북서부에 위치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로 가는 여정을 말한다. 산티아고는 예수님의 12제자 중, 성 야고보 성인의 스페인식 표기라고 한다. (종교적인 얘기는 생략하고) 이 산티아고 성인의 무덤이 발견된 곳에 산티아고 대성당이 지어졌고, 현재 성당 안에 산티아고 성인의 유해가 보존되어 있다.


산티아고로 가는 순례길은 여러 개가 있지만 나는 프랑스 남부 생장(Saint Jean pied de pord)에서 시작해 약 800km를 걷는 프랑스길(Camino Frances)을 택했다. 쉽게 말해 스페인 국경과 근접한 생장에서 국경을 건너 스페인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셈인 거다.




Why Santiago?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기로 한 특별한 이유는 없다.


올해 4월 초, 다니고 있던 스타트업은 현금흐름이 좋지 않아 월급을 주기 어렵다고 했다. 계속 같이 일하고 싶지만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으니 나의 결정에 따르겠다고. 그야말로 핸들이 고장 난 8톤 트럭(?)처럼 갈길을 잃어버렸다. 입사한 지 6개월 만에 일어난 난생처음 겪어보는 일. 그리고 희한하게도 모든 삶의 의욕이 사라지며 방향성을 잃어버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꽤 큰 충격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 같다.


점점 혼자 있는 시간이 늘어났고, 우울했고 아팠고 보이는 것처럼 좋은 상태는 아니었다. 하지만 사회의 시간은 나를 기다려주지 않더라. 36살(만 나이가 무슨 소용이냐)의 나이에 갖춰야 한다는 사회적 관념의 잣대는 나의 빈 공간을 허락하지 않았다. 커리어도, 결혼도, 경제력도 숨 막히는 일들이었다.


7월 한 달간 이직이라도 해야지 싶어 이력서를 정리하고 커피챗을 했다. 그런데 너무 하기 싫은 거다. 이력서 정리도, 구직도, 커피챗도, 일도 전부 다 내가 해야 할 것이 아닌 것만 같았다. 쥐어짜도 낼 힘이 없었다. 다들 너라면 괜찮다고 어디라도 갈 수 있지 않냐고 했지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인정해야 했다. 지금의 나는 아주 힘든 상태에 처했고 10년 넘게 미뤄왔던 내 안의 문제를 더는 외면할 수 없다는 것을. 이미 내가 이런 나를 너무 싫어하고 있다는 것을.


숨만 쉬어도(=구직하며 한 달을 보내도) 돈은 똑같이 나가더라. 이 돈이면 산티아고 가서 쓰는 돈이랑 큰 차이가 없는데(라고 생각했지만 더 쓰고 왔다)? 그럼 안갈이유가 없어서 표를 끊었다. 하지만 표를 끊고 나니 특별한 이유가 있어야만 할 것 같았다. 4개월째 벌이가 없고, 벌고 싶은 의지도 없는 내가 산티아고에 가는 것에 대한 정당성 말이다. 가는 이유를 특별하게 생각해 보려 애썼지만 뭐 그리 특별하겠는가. 그냥 (도망)가고 싶었다.




그러던 찰나에 만난 시 한 편.

이 땅에 속한다는 것은
씨앗 한 톨의 쉼 없는 변화를 아는 것이다
땅 속에 묻혔을 때의 캄캄함
빛을 향해 나아가는 씨앗의 분투
빛으로 성장하는 고통
발아, 그리고 열매 맺는 것의 기쁨
누군가에게 먹이가 되어주는 사랑
자신의 씨앗을 주변에 뿌리고
계절 속에 썩어가고
죽음의 신비
그리고 다시 태어남의 기적까지

‘이 땅에 속한다는 것은 - 존 수우(John Soos)’



앞으로의 여정이 나에게 무엇을 가져다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 땅에 속해있고 싶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 채 그저 땅에만 있는 게 아니라 온전한 씨앗 한 톨의 생애로 속해있고 싶다. 앞으로의 여정, 걱정은 덜고 순간을 걷자. 가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 그것이 산티아고의 끝에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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