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담 보바리- 귀스타프 플로베르
사랑으로 욕망을 채울 수 없었던 여자 보바리 부인
고전을 읽으면서 느끼는 것은 분량 때문인지 유명하다는 이유 때문인지 읽지 않은 사람이 더 많아서 인지 오해와 루머가 많은 것 같다. 마담 보바리도 3대 불륜 소설이라는 명성 때문인지 어떤 기대로 읽었다면 실망하게 되고, 작품을 제대로 보지 못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850년대나 현대나 인간의 모습은 비슷하고, 등장인물들이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캐릭터여서 낮설지 않았지만, 작가인 플로베르가 말하고 싶었던 것이 간단한 것은 아닐 것 같았다. 읽는 내내 엠마는 왜 그런 선택을 했고, 결국 무엇 때문에 그렇게 사랑에 집착하게 되었을까? 묻게 되었다. 그래서 엠마에서 보바리 부인으로 변해가는 성장 일기처럼 글을 쫒아가 보았다.
“ 결혼하기 전에 그녀는 사랑의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 사랑에서 생겼어야 할 행복이 찾아오지 않으니 그녀는 자기가 잘못 생각했던 것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엠마는 책에서 그렇게나 아름다워 보였던 지극한 행복, 열정, 도취 같은 말들이 삶에서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보려 애썼다.”
엠마의 생각처럼 어떤 것을 해 보기 전의 생각과 현실은 엄청난 차이 있다. 나의 20년이 되어가는 결혼생활을 돌아보며 흥분과 좌절했던 경험들이 떠올랐다. 사랑에 대한 개념과 현실의 차이도 [사랑의 기술]에서 처럼 경험이 없고, 자기 반성과 주체로서 개인이 성장하지 않으면 계속 초보자로 남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이 사내는 무엇 하나 가르쳐줄 것도 없고, 무엇하나 아는 것도 없고 무엇 하나 바라는 것도 없었다. 그는 그녀가 행복하다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너무나 흔들림 없는 이 평온과 이 태연한 둔감, 그녀 자신이 그에게 안겨주고 있는 행복 그 자체에 대하여 그를 원망하고 있었다.”
행복의 기준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엠마가 생각한 행복은 평온함은 아니였던 것 같다. 메슬로의 욕구 단계설의 생존의 욕구, 안전의 욕구, 사랑의 욕구, 존중의 욕구, 자아실현의 욕구가 생각났다. 전 단계의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그 다음 단계도 충족되기 어렵듯이 엠마가 처음에 사랑에 대한 단계도 시골에서 벗어나 이러한 생존과 안전의 욕구가 충족되니 사랑의 욕구가 생긴 것이 아닐까 싶었다. 다만 자아실현까지 가기에는 그녀의 삶이 짧았기 때문에 추구하기 어려웠던 것 같다. 사랑에 대해 이 욕구 단계설을 적용하는 것이 억지스러울 수도 있으나 사람은 추구했던 욕구가 만족이 되면 더 많은 욕구를 갖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이치 같았다. 나 또한 흔들림 없이 나를 사랑해주고 지지해준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 지루하고 벗어나고 싶고 했던 감정이 들고 또 다른 새로운 것이 없나 찾았던 경험이 있다.
“ 그녀는 행복하지 않았고, 한 번도 행복한 적이 없었다. 삶은 대체 왜 충만하게 채워질 수 없는 것일까? 삶이 무엇엔가 기대는 순간 그것은 왜 바로 썩어버리는 것일까? 모든 미소는 권태의 하품을, 모든 기쁨은 저주를, 모든 쾌락은 혐오를 감추고 있으며, 가장 근사한 입맞춤도 오직 더 강렬한 쾌락에 대한 실현 불가능한 욕망만을 입술 위에 남길 뿐이다.”
특히나 사람은 욕망을 추구하면 추구할수록 더 갈증이 나고 채울 수 없는 아귀 지옥 같은 것에 빠지는 듯한 허무함을 느끼게 된다. 욕망의 그물에 걸리면 알면서도 빠져나오는 것이 힘든 것은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나도 욕망을 추구 하는 것보다 내 스스로 평온함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고 생각하지만, 욕망의 형태만 바뀔 뿐이지 없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엠마처럼 맹목적으로 한 가지에 빠지지 않기 위해 나를 자꾸 돌아보려 한다는 게 다른 점일 것이다. 특히 내 눈에 띈 것은 엠마의 욕망이였던 것을 보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계산하지 않고 쫒아가는 엠마가 부러웠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같은 상황이 와도 나는 엠마와 같은 선택은 힘들 것 같다. 욕망을 쫒아 가는 삶과 절제하는 삶 둘 다 후회는 남을 것 같지만, 채우는 것만큼 비우는 것의 균형이 맞을 때 삶이 극단으로 가지 않게 된다. 욕망은 채울 수 없지만 만족은 나를 채울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가끔은 완벽해서 행복하기 보다 완벽함을 꿈꾸며 행복을 느끼는 것이 아닐까 싶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