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라-민음사
“영원히, 아우라, 영원히 널 사랑할 거야” “내가 늙어도? 미모를 잃어도? 백발이 되어도? 내가 죽어도 영원히 날 사랑할 거예요?” p.49
‘영원히 ,,,할거야라’는 말을 들었을 때 설레였던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왠지 이제는 부담스럽고 무섭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나이 탓만은 아닐 것 같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쏟아지는 영원성에 대한 메시지와 언어로 표현되는 수많은 말을 들어서인지 이루어질 수 없다는 현실을 알아버려서일까? 쉽지 않은 감성을 너무 쉽게 표현 되서인지 감동이 무뎌지는 것 같다. 어찌 보면 영원한 사랑은 현실에서 이루어지기 힘들어 염원하는 마음으로 문학이든 영상이든 끊임없이 재탄생하고 추구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근래는 이런 영원성에 젊음도 중요한 이슈가 되고 있다. 미국의 한 50대 남성은 자신의 아들의 피를 수혈받아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고 한다. 누구나 젊고 건강함을 원하고 변치 않기를 바랄 것이다. 그런데 영원히 젊은것이 꼭 좋은 것일까? 이 책을 보며 생각하게 되었다.
‘너는 광고를 읽어’라는 첫 줄 시작부터 누가 주술을 거는 듯한 주문같은 2인칭 화법은 책에 쏙빠져들게 했다. 감각적이면서 육감적인 생생한 묘사와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환상적인 분위기 때문인지 마치 스릴러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60페이지도 안 되는 단편인데도 읽는 내내 결말을 다양하게 추측하게 만들면서 반전을 통해 끝까지 긴장감을 늦출 수 없게 만든 구성이 참 독특했다. 특히 작가인 카를로스 푸에테스의 작품 뒤에 붙여 놓은 창작노트를 보면, 짧은 단편을 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자료와 준비를 했는지 그의 노력과 능력에 놀라게 된다. ‘아우라’라는 제목 또한 여러 가지를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데, 눈에 보이지 않지만 느낄 수 있는 후광 같기도 하고, 그림자 같기도 하고, 존재의 가치가 평가되기도 하는 도구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사전적 의미로는 인체로부터 발산되는 영혼적 에너지라고 한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산들바람의 여신이면서 유혹이나 실체가 없는 것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주인공인 콘수엘로 부인이 늙고 병들어 쇠약해진 몸을 영원한 젊음과 사랑으로 채우려 실체가 없는 환영으로 불러내는 것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젊은 역사가인 펠리페 몬테로는 그 환상에 유혹되어 사랑하게 되고, 진실을 알았을 때 충격을 받게 된다.
너는 이제 다시 시계를 보지 않을 거야. 그 쓸모없는 물건은 인간의 허영심에 맞게 조정되어 거짓 시간을 재고, 지겹도록 긴 시간을 표시하는 바늘들도 진정한 시간, 즉 모욕적이고 치명적으로 흘러서 그 어떤 시계로도 잴 수 없는 시간을 속이는 것에 불과해. 한 평생, 한 세기, 반백 년, 이제 네가 이러한 거짓된 기준을 상상하는 건 불가능할 거야. 이제 네가 실체도 없는 먼지 같은 것을 손아귀에 쥔다는 건 불가능할 거야. p.59
시간 속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인간은 아직 없다. 나이 들어가는 외모와 영원한 사랑은 시간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붙잡았다고 느껴질 때 삶에 만족을 느끼게 되는 것 같다. 100년을 못 사는 인간이 젊음과 영생을 꿈꾸는 건 고대에도 여러 신화나 전설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이야기이다.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라 삶의 끈을 놓지 못하고 더 젊어지기 위해 또는 더 사랑받기 위해 욕망하는 건 본능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그러한 모든 것들이 언젠가는 끝난다는 것을.. 나 또한 50이 되어가는 나이에 이러한 사랑과 젊음을 붙잡고 싶지만, 그 쪽으로 남은 삶의 에너지를 쏟는 게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위에 우리가 좋아하는 사람들이나 우리를 사랑해주고 지지해주는 사람들은 분명 내가 젊고 예뻐서만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내가 바꿀 수 없는 곳에 에너지를 쓰는 것보다 내가 스스로 빛날 수 있게 가꾸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시간이라는 구속에서 벗어나 우리의 아우라를 젊어지게 하는 비결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