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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란 Jun 26. 2023

거울 속의 나에게 보내는 안녕

한강의 <희랍어 시간>과 보르헤스의 <픽션들>, 그리고 <화엄경>

'우리 사이에 칼이 있었네, 라고 자신의 묘비명을 써달라고 보르헤스는 유언했다.' 한강이 2011년경 발표한 장편소설 <희랍어 시간>의 첫 문장이다. 지난 글에서도 이야기했지만 내게 이 소설은 사적으로 무척 진하고 깊은 경험으로 기억되어서, 가장 좋아하게 된 한강의 장편소설이다. 이 책 덕분에 보르헤스에 관심을 가졌고, 그래서 어렵게 어렵게 그의 단편집 <픽션들>을 완독했다. 사실 온전히 이해하며 읽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그가 소설집 내내 어떤 것을 힘주어 이야기하고자 했는지는 대강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그의 소설 세계가 전반적으로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지 맛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한강의 <희랍어 시간>에서 보르헤스가 남긴 유언과 보르헤스의 소설세계가 갖는 특징은 초반에 약간 언급되는 것처럼 나오지만, 소설을 끝까지 다 읽고 나면 그것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바와 깊은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소설 초반에 따르면 '우리 사이에 칼이 있었네'라는 문장은, 고대 북구의 서사시에서 인용한 것이라 한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한 침상에서 보낸 첫 밤이자 마지막 밤, 새벽이 올 때까지 그들의 사이에 장검이 놓여 있었다고 한다. 이 북구 서사시 속 장면은 (스포일러일지 모르겠지만, 사실 이 소설은 스포일러가 중요한 소설은 아니다) 소설 후반부에서 주인공들에게서 재현되는 듯한 느낌으로 등장한다.


<희랍어 시간>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어느 날 갑자기 입 밖으로 말이 나오지 않게 된 여자가 있다. 그는 이전에도 이같은 현상을 겪은 적이 있으며, 그때마다 모든 일상이 중단되었다. 이번에도 그랬다. 하던 일을 모두 중단하였다. 그는 최근에 어머니를 떠나보내고 하나 있는 아이를 이혼한 남편에게 보냈다. 심리 상담을 받지만 뾰족하게 나아지는 게 없다. 그는 '언어'에 경외감 이상의 공포를 느끼고 있다. 자신의 인지와 감정이 언어에 갇히고 오염되는 것을 느낄 때마다 죽음에 가까운 허무와 어둠에 사로잡힌다. 그러던 중 고대 희랍어 수업을 수강하게 된다. 그곳에서도 그는 수업은 열심히 듣지만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는다.


한편 어느 날부터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는 남자가 있다. 그는 독일에서 오랜 시간 살았고, 그의 병은 유전적 요인에 기인한 것이었다. 독일에서 연인과의 뼈아픈 이별, 친구의 죽음 등 여러 사건을 겪은 그는 어느 날 오랜 독일 생활을 청산하고 가족과 헤어져 한국으로 와 고대 희랍어 수업의 강사로 일하게 된다. 소설은 그의 지난날을 면밀하고 섬세하게 파고들며, 그가 보르헤스의 문학세계와 화엄사상, 고대 그리스 철학과 문학의 세계에 경도된 배경을 찬찬히 보여준다. 그러면서 희랍어 수업에서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는, 죽음에 가까운 침묵 속에 잠겨 있는 여자 수강생을 보고 미묘한 호기심을 느낀다. 그러던 어느 날, 학원의 구석진 계단참에서 우연하고 작은 사고를 당해 안경을 잃고 당황한 그에게, 그 여자 수강생이 다가온다.


이 소설의 전개는 정말 천천하고 차분하게 진행되는데, 그렇다고 흡인력이 없는 것은 아니다. 각 주인공이 처한 상황 자체가 소설적 긴장감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말을 하지 않는(못한)다는 것, 시력을 잃어간다는 것은 현실에서 일상을 영위하는 데 큰 장애요소다. 우리의 감각기관은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는 데 무엇 하나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생물이기에 외부세계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고, 그 중에서도 사회적 동물이기에 온몸으로 느낀 것을 온몸으로 타자에게 표현하며, 또 온몸으로 타자의 표현을 받아들인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살 수가 없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살아있더라도 살아있다고 보기 어렵다.


소설에서 남자가 천착한 고대 그리스 철학, 그 중에서도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의 세계는, 감각 이상의 세계이다. 플라톤은 진정한 아름다움은 현실에 있지 않다고, 이데아는 현실 너머에 있다고 말한다. 남자는 한때 소멸과 죽음의 이데아에 대해 고민한 적이 있으나, 그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철학적 사유의 동지였던 요아힘은 이를 정면으로 반박한다.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는 순전한 빛이며, 거기에는 어둠과 죽음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인간의 불완전한 감각기관, 형이하학의 세계에서는 붙들 수 없는 지고지순한 형이상학의 세계, 그것이 이데아라는 것이다. 슬프면 눈물 흘리고 아프면 피 흘리는 연약한 몸으로는, 겪을 수 없는.


이 소설의 초반이 보르헤스의 유언에 대한 내용으로 시작하는 것, 남자가 독일에서 한국으로 올 때 보르헤스가 불교 관련 강연을 한 내용을 엮은 책과 <화엄경> 관련 책들을 가져온 것, 소설의 중간중간에 남자가 불교적 의식들과 화엄세계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이 소설이 중요하게 다루는 플라톤의 철학과는 상반되는, 감각의 세계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함이다. 보르헤스의 <픽션들>은 독자들에게 역사 또는 현실의 사건이나 인물, 책을 계속 보여주면서 그 속에 일말의 허구를 은근하게 집어넣는다. 독자들은 그 일말의 허구가 현실인지 아닌지 헷갈려하며 책을 읽게 된다. 현실과 환상이 뒤섞이는 것이다. 한편으로 소설에 미로, 거울, 반복되는 꿈을 직접 소재로 등장시키도 한다. 그에게 현실과 환상은 구분되지 않는 것이었다.


한편 <화엄경>에서는 우리가 사는 현실이 실은 꿈이고, 이에서 깨어나 해탈해야 한다고 줄곧 말한다. 우리가 집착하는 모든 욕망과 인연은 감각의 세계에 국한되어 있는 것이다. 현실에서 우리를 사로잡는 욕망과 인연의 사슬을 끊는 것이 모든 번뇌로부터 벗어나는 길이며, 이것이 해탈과 열반으로 가는 길이다. <화엄경>의 내용을 대강이라도 살펴본다면, 보르헤스가 말년에 화엄사상에 왜 경도되었는지, 그가 소설에 왜 미로와 거울, 반복되는 꿈의 이미지를 계속 등장시켰는지 알 수 있다. 그에게도 현실은 환상과 다름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감각기관은 연약하고 불확실한 것이어서, 세계를 있는 그대로 포착할 수 없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 우리가 만지는 것이 정말 세계의 진실인가, 또는 우리 마음을 온전히 말이나 글로 담아낼 수 있는가. 이 질문에 우리는 확답할 수 없다.


여자가 언어에 공포를 느낀 것은 그래서이다. 감각기관의 한계, 우리 몸이 가진 연약함과 유한함을 알기 때문에. 그러나 한편으로 시력을 잃어가는 남자에게는, 그 불완전한 감각기관으로 느껴지는 모든 감각이 무척 소중하다. 동생 란의 노래가 담긴 CD를 듣는 밤, 동이 트기 전에 눈을 떠 맞이하는 희미한 새벽, '어둠의 피륙이 낱낱이 파르스름한 실이 되어 내 몸을, 이 도시를 휘감는 광경을 보'는 것, '그 짧은 파란 빛에 얼굴을 담그'는 것은 가슴 떨리는 일이다. 플라톤은 이데아의 세계를 줄곧 말하지만, 실은 그렇기 때문에, 이데아의 세계 아래에 존재하는 인간의 연약함과 유한함을 누구보다도 절감하는 사람이었다고 봐야 한다. 인간은 너무나도 연약하고 유약하기에, 그의 감각기관들 또한 너무나도 불완전하기에, 그래서 더욱 눈에 보이지 않는, 순전한 아름다움을 추구했던 것이다.


소설의 후반부는 사고를 겪은 남자를 여자가 도와주고(어떻게 도와주었는지는 책을 통해 직접 확인하시라), 서로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한 남녀가 남자의 집에 가서 기묘한 대화를 나누는(말을 하지 않는 여자가 눈이 잘 보이지 않는 남자와 어떻게 대화를 나누었는지도, 책을 통해 직접 확인하시라) 장면으로 이루어진다. 불완전한 감각기관으로나마 천천히, 차근차근, 그러면서도 자신들이 겪어온 삶의 고통과 아름다움에 대해 낱낱이 이야기를 나누는 이 장면은 환상적이면서도 따뜻하고 경이롭다. (총 21장과 마지막 0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소설의 백미는, 20장 마지막과 21장에서 펼쳐지는 남녀의 정사(情事) 장면이다. 개인적으로는, 여태까지 읽어본 국내·외 소설의 정사 장면 중 가장 아름답고 서정적이며 환상적인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도덕과 윤리, 철학과 종교의 세계에서 욕망이란 억제해야 하는 것이다. 삶은 견뎌야 하는 것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우리의 감각기관이 받아들이는 세계의 모습은 진실이 아니며, 우리의 삶 또한 덧없고 유한한 것이므로, 우리는 이 너머에 있는 절대적인 가치를 추구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고. 그러나 문학의 세계, 예술의 세계에서 욕망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때로 아름다운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감각기관으로 느끼고, 느낀 바대로 사유하고 표현한다. 그 과정에서 세계의 냉혹함에 부딪치고 쓸려 상처 입기도 하지만, 그 고통마저 인간이기에, 유한하고 연약한 감각기관을 갖고 있기에 겪는 것이다. 시력을 잃어가는 남자에게 매일 새벽이 환희이듯이, 매일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우리 모두에게 남아있는 삶은, 그래서 무척 소중하고 아름답다.


보르헤스가 자신의 소설세계에 계속해서 거울과 미로의 이미지를 등장시킨 것도, 어쩌면 그래서가 아닐까. 화엄사상이 말하는 욕망과 인연의 덧없음, 인간의 신체가 가진 연약함과 유한함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러나 그것들 또한 분명히 문학적으로(예술적으로) 성취될 수 있는 특유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거울 속 나의 모습이 꼭 허상처럼 느껴지지만도 않는다. 거울 밖 나도, 거울 안 나도, 나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몸으로 직접 슬퍼하고 아파하고 기뻐하는 것, 우리가 느끼고 내보이는 것 모두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구성하는 아름다움이고 고통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도 거울 안 나에게 조용히 손을 들어 인사해 본다. 안녕, 잘 있었니. 나도 건강히 잘 있어. 그리고 보르헤스의 유언 속, 빛나는 장검을 굽어본다. 단단한 세계와 연약한 나 사이에 놓인 하얗고 빛나는 경계를, 오래도록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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