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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란 Oct 07. 2024

사랑을 말할 때 필요한 것들

보내는 마음, 맞이할 준비

그애를 보내고 아린 손가락들을 억지로 움직여 아프게 뜨개질을 하던 밤들로부터 몇 년이 지났다. 그동안 가까운 지인으로부터 그애의 소식을 멀리서나마 이따금 전해 들었다. 건강히 잘 지내고 있으며, 새로 맡은 일에도 열심을 기울인다고. 그애는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으므로, 나는 그애가 늘 건강하고 행복하게 지내기를 바란다. 나의 가장 다정하고 사랑스러웠던 친구가 사라진 것은 무척 아쉬운 일이었지만, 그애와 나의 끈이 가늘고 짧았다. 어쩔 수가 없었다.


그애를 보내고 나는 오래 애도했다. 실은 지금도 애도하고 있는지 모른다. 우리의 지난 시간들을, 내 안에 남아있는 그애의 흔적들을. 8년이라는 시간동안 내 안에 쌓인 그애가 너무 사소하면서도 많아서, 생각지도 못한 것들에서 자주 그애를 다시 만난다. 예를 들면 커피나 차의 취향, 어디고 머문 자리를 깔끔하게 치우는 버릇, 좋아하는 사진의 색감, 특정한 단어들, 어느 계절의 하늘과 구름 모양, 어떤 영화들, 어떤 순간이 주는 또렷한 감각들.


그리고 언젠가는, 정말 언젠가는, 다시 사랑이 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애가 내게 주었던 모든 기억들이 너무나도 소중하기에, 그로 인해 내 삶의 일부가 너무나도 아름다웠기에, 그같은 경험이 단 한번 뿐이라는 것을 믿고 싶지 않아서, 언젠가는 다시 사랑이 하고 싶다고. 누군가를 생각하면 잠이 오지 않는 그런 밤을, 한번 더 맞이해 보고 싶다고. 사실 그애를 사랑하면서 한번도 아프지 않았나 하면 그건 아니었다. 그애가 내게 무슨 잘못을 해서가 아니라, 내가 너무 허약하고 스스로 미덥지 못해 혼자 아팠던 적도 있다.


아마 다시 누군가를 사랑하더라도 나는 또 아플 것이다. 여전히 허약하고 미덥지 못하기 때문이다. 혼자 오래도록 말 못하고 속을 끓일 것이다. 이따금 미지근한 눈물로 베갯잇과 귀와 볼을 적시기도 할 것이다. 그럼에도 사랑은 다시 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애에게 받았던 것과는 다른 종류의 사랑을 받을 수 있어도 좋다. 그애를 만나던 시절보다 조금 더 튼튼해진 나는, 내가 다시 사랑할 누군가에게, 당시 그애에게 주었던 것보다 조금 더 튼튼한 사랑을, 더 많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기를 바란다.

      

사랑을 하던 시절의 나는, 때로 앓기도 했지만 오래 행복했다. 사랑하는 이를 만나러 가는 시간은 늘 설레고 떨렸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사랑하는 이의 뒷머리가 콩알만큼 작게 보여도, 그애구나, 생각할 수 있었다. 그 생각만으로 환하게 웃을 수 있었다. 입술을 비집고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접히는 눈가를 어쩔 줄 몰랐다. 사랑하는 이의 손에 내 손끝을 가져다대는 것이 무척 조심스러웠다. 사랑하는 이의 따뜻한 살갗에 내 살갗이 닿는 것이 부끄럽지만 벅찼다. 마주 안을 때 느껴지는 심장박동이, 천천한 호흡이 따뜻했다. 살아있다는 걸 새삼스레 느낄 수 있어서, 토막토막이나마 행복했다.


다시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더라도, 그래서 그때의 행복과 비슷한 행복을 다시 토막토막이나마 누리게 된다 하더라도, 아마 그애는 항상 내 마음 속 가장 깊은 서랍에 있을 것이다. 언젠가 다른 글에도 썼지만 내 젊은 한 시절이 온통 그애였기 때문이다. 성인이 된 이후 나의 취향이나 성정의 어떤 부분들, 삶을 대하는 가치관이나 태도, 그런 것들을 가장 섬세하게, 오래도록 다듬어준 사람이 그애였기 때문이다. 내게 사랑-특히 성애-을 아는 인간의 삶을 가르쳐준 사람이 그애였기 때문이다. 그애는 나의 친구이자 선생님이었고, 어떨 때는 피붙이보다 다정한 가족이었다.


그애를 보내고 어느덧 네 번째 가을을 맞았다. 이제는 밤새 뜨개질을 하던 들에 느꼈던 손가락의 통증도, 그애를 떠나 혼자 걷던 길에서 가득 받았던 토요일 오후 햇빛의 기억도 너무나 멀리에 있다. 엷어진 슬픔들을 마저 시간의 강에 띄워 보내며, 언제일지는 몰라도 어떤 형태로든 내게 천천히 또는 돌연히 다가올 것들을 생각한다. 맞닿은 손으로부터 옮아지는 온기를, 웃음 띤 눈빛을, 가슴을 간질이는 떨림과 두근거림을. 그 모든 것을 안은 채 전해지는, 사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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