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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란 Jun 20. 2023

사랑을 말할 때 필요한 것들

너의 마음도 나와 같다면

그 주인가 그 다음 주인가에, 우리는 만났다. 함께 늦깎이 취업을 위한 공부를 하던 사이라, 대학 캠퍼스의 스터디실을 빌려 문제를 풀던 때였다. 해가 빠르게 저물고 어둠이 먹먹하게 차오르는 이른 봄날 저녁이었다. 날이 아직 추워 우리 둘 다 긴 모직 코트를 입고 있었다. 그 애는 나보다 추위를 더 많이 타고, 손도 잘 트는 편이라 검은색 가죽장갑까지 단단하게 끼고 아마 머플러도 둘둘 둘렀을 것이다. 우리는 다소 가파른 내리막길을 더듬더듬 내려갔다. 저녁 바람이 꽤 차가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날 하필 왜인지 내가 구두를 신고 있었다. 나는 평소에 구두를 잘 신지 않는다. 발등 피부가 신발 가죽에 닿으면 잘 벗겨지는 데다, 구두굽이 조금이라도 높으면 정신없이 비틀거리기 때문이다. 익숙지 않은 신발 때문에 자꾸만 발을 헛디뎠다. 그 애가 문득 내 손을 잡아주었다. 정신없이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미안, 너 좀 지팡이로 쓸게, 하고 웃었던가. 그 애도 마주 웃었던가. 우리는 천천히 길을 내려갔다. 살얼음이라도 끼었는지, 마치 별빛이 내린 것처럼 길이 반짝거렸다. 아니면 그걸 보는 내 눈이 반짝거렸던가. 그날 밤도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리고 그 애는 그 다음날인가부터 남부지방으로 매화를 보러, 긴 여행을 갔다. 마음이 복잡했다. 그 애 얼굴을 보고 싶은데 볼 수가 없어서 섭섭하고 서운했다. 그렇게 적적한 하루를 보냈는데, 그날 밤에 그 애에게 전화가 왔다. 목소리를 낮추어 조용히 받았다. 여행 재미있어? 응, 재미있어. 매화가 정말 예뻐. 눈송이 같아. 그렇구나. 좋겠다... 나중에 너도 같이 왔으면 좋겠다. 그래...? 응. 그 애의 말에, 뭐라 말을 더 이을 수가 없었다. 혹시 저 애가 내 마음을 알고 불편해 하면 어쩌나 마음 졸이던 날들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그 날, 사실은 장갑을 끼지 않은 손으로 네 손을 잡고 싶었어. 대꾸하지 못하는 나에게, 그 애가 말했다. 내가 구두를 신었던 날, 그 애를 지팡이 삼아 지하철역까지 더듬더듬 걸어갔던 날의 이야기다. 그 애의 가죽장갑 낀 손이 내 손을 맞잡았던 날, 서로의 팔과 팔이 바싹 가까워졌던 날, 그 애의 입김과 나의 입김이 저녁 어스름에 섞여 하얗게 부서졌던 날. 나중에 나의 단짝이 되고 나서 그 애는, 실은 처음 입을 맞추던 날의 기억보다 처음 손을 잡았던 날의 기억이 더 강렬했다고 말했다. 그만큼 내 손을 잡는 것을, 그 애는 좋아했다. 내 손을 잡고 나서, 그 애는 알았다고 했다. 내가 이 사람을 좋아하는구나.


그렇게 우리는 단짝이 되었다. 늦깎이 취업준비생으로, 두꺼운 책들을 낙타처럼 짊어지고 다니며 스터디실을 전전하며 지내면서. 돈 한푼 벌지 않아 데이트 때마다 좋은 카페도 갈 수 없었다. 핸드드립 커피를 좋아하는 나를 위해, 그 애는 집에서 커피를 내려 보온병에 싸가지고 왔다. 그 애는 원래 진한 커피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데 나는 그 애 덕분에 온갖 비싸고 좋은 원두의 핸드드립 커피를 매주 마셨다. 단정한 글씨로 라벨스티커에 원두 이름을 또박또박 쓰고, 그걸 내린 커피가 든 생수병에 붙여서 갖다주었다. 공부하는 틈틈이 먹어, 하며. 나는 커피를 다 먹고도 그 애의 글씨가 적힌 라벨스티커를 차마 버리지 못했다. 


한강공원의 산책로, 대학교 캠퍼스, 무료전시를 여는 갤러리들, 또는 한갓진 보행로... 그런 곳들에 앉아서, 또는 서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우리의 데이트였다. 서로 공부하는 시간을 확보해야 했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들어서는 안 되었고, 비용이 많이 들어서도 안 되었다. 그래도 좋았다. 남들은 대학생 때나 해보는 것들을, 우리는 20대 후반에야 했다. 남들은 척척 붙는 시험에 꼬박꼬박 실패하면 비참해서 속울음을 울면서, 그래도 서로 목소리를 들으면, 눈을 맞추면, 손을 잡으면, 좋았다. 나의 20대 후반과 30대는, 온통 그 애였다. 그 애는 나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오빠이자, 남동생이자, 상담자이자, 선생님이었다.


그 애는 언제나 내게 먼저 의견을 물어왔고, 내가 망설이면 여러 개의 선택권을 보여주며 골라보라 했다. 내가 워낙 우유부단한 사람인 걸 잘 알아서, 내 고민하는 시간을 덜어주려 한 것이다. 그 애는 내게 단 한번도 나쁜 말을 하거나 큰 소리를 낸 적이 없다. 내가 천성이 예민하고 소심한 데다 피해의식이 많다는 걸 알아서였다. 내가 지나치게 걱정하거나 무서워하면 내 등을 토닥이며 진정시켜주었고, 스트레스를 받아 속이 얹히면 가라앉을 때까지 가만가만 배를 쓰다듬어주고 꼭 안아주었다. 평소 생리통이 심한 게 안쓰럽다며, 내가 평소에 잘 먹는 브랜드의 진통제를 기억해두었다가, 내 낯빛이 안 좋아지면 건네주었다. 


가족을 포함하여, 내가 평생을 살며 알아온 사람들 중, 가장 섬세하고 다정한 사람이 그 애였다. 색으로 치면 연보랏빛 같은 사람이었다. 언제나 따뜻하고 차분하고, 때로는 예스러운 말장난을 할 때도 있었는데 그조차 퍽 귀여웠다. 같이 길을 걷다 내 운동화 끈이 풀리면, 문득 무릎을 꿇어앉아 끈을 묶어주곤 했다. 그때 숙어진 머리가 도토리처럼 귀여워서, 나는 그 애 머리 쓰다듬는 것을 좋아했다. 부드러운 머리칼이 내 손을 스치는 것이, 맑은 햇빛이 그 애 머리칼에 쏟아지는 걸 보는 것이 좋았다. 그 애는 그럴 때 내게, 그렇게 좋아요? 라고 말하는 것을, 좋아했다. (우리는 단짝이 된 후로 서로 존댓말을 썼다) 


그렇게 8년을 만났다. 길게 만나야지, 작정한 게 아니다. 지내다보니 8년이 되었다. 8년간 서로 단 한번도, 싸운 적이 없었다. 서로 큰 소리가 오간 적조차 없었다. 마치 모든 풍파를 건너다보는 노년의 부부처럼, 그렇게 만났다.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게, 그렇게 만났다. 그 애와의 기억 중에 괴롭고 힘들었던 기억은, 정말 없다. 그 애는 그런 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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