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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란 Jun 21. 2023

슬픔을 활용하는 방법

치유로서의 글쓰기와 글 읽기

문득 잠에서 깨었을 때, 베개가 온통, 뺨이 온통, 눈이 온통 젖어있다는 것을 알았다. 자면서 울었던 모양이다. 잠에서 깨어나고도 한참을 더 울었다. 이러다 눈과 뺨이 짓무르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한참동안 눈물을 흘렸다. 계속 누운 채여서 눈물이 귀에 가득 고여 먹먹해지고, 목이 메이고, 가슴이 조이는 것처럼 아팠다. 심호흡을 천천히 몇 번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서도 조금 더 울다가, 생각했다. 무엇이라도 좋으니 글을 쓰자. 이 마음을 오래도록 잘 간직해 두기 위해.


우리는 근사하고 좋은 여행지에 가서, 또는 유명한 식당에서 맛있는 밥을 먹을 때, 사랑하고 좋아하는 이와 행복하고 기쁜 시간을 보낼 때, 핸드폰이나 카메라를 꺼내어 사진을 찍고 영상을 남긴다. 그 순간을 간직하려고, 시간이 지나고 나면 사라질 그 좋은 기억을 쉽게 잃어버릴 것이 두려워서. 그러니까 무언가, 누군가를 잃어버리고 싶지 않아서. 무언가, 누군가를 잃어버린 적이 있는 사람들은 안다. 그 무언가, 누군가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모두 찰나의 생을 산다.


어떤 순간을 이미지로 기억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텍스트로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 나는 후자에 가깝다. 바람에 흩어지는 나뭇잎을 볼 때, 그 나뭇잎들 사이로 오후의 부드러운 햇빛이 비칠 때, 마음으로는 아름답다고 생각하며 머릿속으로는 계속 이 아름다움에 알맞은 단어를 고르고 문장을 생각한다. 말이란, 글이란, 아름다움을 온전히 담아내는 그릇은 아니다. 내가 느낀 벅참과 아름다움은 때로 글이나 말로 표현되지 않는다. 얼마나 불완전한지. 그럼에도 최대한 적확하고 가까운 표현을 찾아 헤맨다. 끊임없이 닦고 또 닦는다.


평론가 신형철의 책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에서 그는 책을 쓰게 된 계기를 언급하며, 타인의 슬픔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공감하려면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소중한 무언가, 누군가를 잃어버려 본 사람은 안다. 상실이 얼마나 뼈아픈 기억인지. 보통의 선량한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타인의 감정을 생각할 줄 안다. 그것이 공감이다. 그래서 우리는 때로 슬픈 영화를 보고 슬픈 글을 읽고 조용히 눈물을 흘릴 수 있다. 잃어버려 본 적이 있기 때문에, 잃어버린 슬픔을 안다. 자신의 슬픔을 돌아보며, 타인의 슬픔을 짐작할 수 있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 신경숙의 장편소설 <깊은 슬픔>을 읽고 죽음을 생각한 적이 있다. <깊은 슬픔>은, 사랑을 상실하는 여자의 이야기다. 온 몸과 마음으로 부딪친 사랑이 결국 좌절되는 과정을, 책은 천천하고 깊게 그린다. 당시 내가 누구를, 무엇을 그렇게 절절하게 사랑했는지는, 이제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진심으로 죽고 싶어했던 기억만이 남아있다. (스포일러가 될지 모르겠지만, 소설 속 주인공 여자는 소설 마지막에 죽음을 시도하는 것 같은 뉘앙스를 남긴다) 나는 베르테르 효과를 믿는다. 잘 쓰인 어떤 소설은, 사람을 죽고 싶게 만들 수 있다. 그러니까 나는, 그 소설로 지독하고 깊은 슬픔을 정말 열심히 공부해본 셈이다.


그러니까 글쓰기는, 글 읽기는, 나의 슬픔을 바라보는 방법이다. 나의 슬픔에 더 깊이 빠져 우울의 늪으로 들어가 허우적대지 않고, 그로부터 한발 물러나 조용히 바라보는 방법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슬픔을 짐작하는 방법이다. 내가 무언가, 누군가를 잃어버려 이렇게 슬프고 아픈데, 다른 사람들은 오죽할까 생각한다. 얼마나 아프고 비참할까. 그 마음을 헤아리다보면, 어느덧 슬픔이 천천히 나로부터 물러간다. 밤이 지나 새벽이 오듯이. 어둑했던 사위가 희부옇게 밝아져 오듯이. 지금 나도 그렇다. 어느덧 젖었던 얼굴이 말랐고, 창밖이 밝아져 있다.


정호승의 시 '슬픔이 기쁨에게'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추위에 떨며 귤을 파는 할머니에게 귤값을 깎으며 기뻐하는 '너'에게 화자가 말하는 것이다. 뼈시린 추위에 떨어본 적이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추위에 떨며 힘들어하는 모습을 지나치지 못한다. 무언가 또는 누군가를 잃어버려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상실의 고통을 안다. 그래서 우리는 슬픔을 공부해야 한다고, 신형철은 말한다. 우리가 언젠가 다시 슬퍼질 때, 그 슬픔으로부터 결국 빠져나오려면, 그래서 삶을 지속하려면, 슬픔을 잘 알아야 한다. 고통스럽더라도 마주볼 줄 알아야 한다.

  

결국 슬픔으로부터 어떻게든 빠져나오기 위해, 그래서 이 유독한 현실을 어떻게든 견뎌보기 위해, 나는 글을 쓴다. 글을 읽는다. 슬픔의 기억을 어떻게든 간직해 보기 위해, 이것을 너무 쉽게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그래야 다른 사람의 눈물을 기꺼이 닦아줄 용기가 생길 것 같다. 다른 사람의 슬픔에 같이 슬퍼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누군가 슬픔으로부터 빠져나오려 하는 사람들에게도 넌지시 권해본다. 글을 쓰고 읽어보라고. 슬픔을 공부해보라고. 그로부터 한 발짝 멀어졌다가, 다시 천천히 가까워져 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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