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
내가 사랑하는 작가들과 이야기들
독서모임을 가면 아이스브레이킹 타임에 가끔, 무인도에 단 한권의 책을 들고 간다면 어떤 책을 들고 가겠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나는 그때마다 한권의 책이 아니라 단 한편의 글을 들고 가겠다고 말한다. 한강의 단편소설, '노랑무늬영원'이다. 이 소설은 2003년 출간된 <(현장비평가가 뽑은) 올해의 좋은 소설>에서 처음 읽었다. 그러니까 나는 2003년에, 내가 대학교 1학년이던 때, 한강이라는 작가의 작품을 처음 읽어보았다. 그리고 지금까지 내가 가장 좋아하는 한국 현대소설가는 한강이다.
'노랑무늬영원'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교통사고를 겪어 두 손을 못 쓰게 된 한 여자가 있다. 그는 화가로 왕성하게 활동하던 중, 우연히 닥친 사고로 두 손의 신경을 잃고 깊이 절망한다. 작업은커녕 일상생활조차 거의 할 수 없게 된 상황. 그의 남편은 처음에는 그를 돌보며 그와 다시 생의 의지를 다지려 하지만, 작업을 하지 못하게 되어 화가의 생명이 끝난 그가 깊은 수렁 속으로 빠져들자, 이내 차가워진다. 계속 절망하던 여자는 어느 날 친구를 만나러 가던 길에 한 사진관 앞에서, 20대의 자신의 모습이 크게 확대되어 찍혀있는 사진을 발견한다.
소설의 분량은 단편이기 때문에 길지 않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한강의 정수가 담겨있다. 동물성보다는 식물성에 가까운, 동적이고 경쾌하기보다는 정적이고 차분한, 그의 섬세하고 아름다운 문장들이 소설 곳곳에서 부드럽게 빛난다. 무엇보다, 그가 00년대 이후 천착해온 세계와 인간에 대한 탐구의 과정이, 그 과정에서 발견한 가느다랗고 희미한 희망의 징조가, 소설 마지막 장면에 낱낱이 드러난다. 나는 그게 좋았다. 처절하고 고독한 오랜 걸음 속에서 찾아낸, 아주 희미한 단 한 줄기의 빛 같은 희망의 징조가.
이런 희망의 징조는 이후 한강이 발표하는 다른 소설들에서도 계속해서 나타난다. 한강은 지독한 절망 끝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는 희망의 징조를 예리하게 잡아낼 줄 아는 작가다. 미스터리 스릴러의 기미가 엿보이는 <바람이 분다, 가라>, 각각 광주민주화운동과 제주 4.3. 사건 희생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뼈아프게 그려낸 <소년이 온다>와 <작별하지 않는다>, 그리고 눈이 멀어가는 남자와 말을 잃어버린 여자가 서로에게 아주 천천히 다가가는 이야기인 <희랍어 시간>까지. 그는 글과 말이 가진 힘을 누구보다도 강하게 믿는 사람이다. 그래서 모든 글이 무척 조심스럽고 우아하다. 그 태도를, 나는 사랑한다.
사실 사춘기 시절부터 30대 초까지의 나는 편독이 매우 심했다. 비문학에는 거의 손도 대지 않았으며, 그나마 문학작품 중에서도 서양 고전이라 할 만한 것은 정말 읽어보질 않았다. 당시는 한국 현대소설, 그것도 거의 대부분 80년대 이후 데뷔한 여성작가 소설에만 엄청나게 매달렸다. 오정희를 비롯해 신경숙, 정미경, 은희경, 정이현 같은 작가들이 작품을 내놓을 때마다 찾아 읽었다. 그러다보니 영미소설은 정말 늦게 읽은 편이다. 최근에 매우 좋아하기 시작한 것은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의 대가 레이먼드 챈들러. 그리고 작품을 많이 읽은 것은 아니지만 단 한 작품에 굉장히 탐닉하게 된 작가, 얼마 전에 타계한 코맥 매카시. 그 정도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미권 현대소설가다.
레이먼드 챈들러가 만들어낸 캐릭터 필립 말로는, 내가 사춘기 시절부터 줄기차게 탐독한 셜록 홈즈 시리즈로부터 가까스로 빠져나올 수 있게 한 인물이다. 필립 말로 시리즈를 읽어보면 챈들러가 30년대 이후 미국 사회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는지를 흥미진진하게 이해할 수 있다. 어떤 (여성) 독자들은 그의 캐릭터가 마초적이고 지나치게 거칠어서 싫어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미 그에게 깊이 빠져버린 내게는, 그런 그의 삐딱함마저도 왠지 퍽 귀엽게 느껴진다. <빅슬립>으로 시작한 북하우스의 시리즈는 결국 전권을 모두 사고 말았다. (이북을 포함해서지만) 6권 중 가장 좋아하는 것은 <빅슬립>, <안녕 내 사랑>, <기나긴 이별>인데, 시리즈가 거듭될수록 나이를 먹어가며 낡아지는 필립 말로의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다. 얼핏 차갑고 야수처럼 보이는 고독한 남자의 외로운 뒤태를 바라보는 느낌.
코맥 매카시는 사실 코엔 형제의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원작 작가로 처음 알았다. 그 영화가 워낙 잔인하고 인상적이었어서, 그 작품의 원작 소설이 읽고 싶었다. 2008년 당시 영화의 상영으로 원작 소설도 사피엔스에서 발간되었는데, 5쇄 이후에 절판된 것 같다. 정말 어렵게 헌책방에서 책을 구해 거듭해 읽었다. 굉장한 소설이었다. 어제도 다시 읽었는데, 이 소설은 정말 몇 번을 더 읽어도 굉장하다고밖에 할 수가 없다. 읽는 내내 숨이 가빠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실제로 소설에는 구두점이 거의 쓰이지 않았다)
스토리라인은 무척 간단하다. 용접공으로 살아가는 한 평범한 남자(모스)가 어느 날 우연히 총격전이 벌어진 후의 현장에서 거액의 돈가방을 발견하고 챙겨 달아난다. 이 현장은 마약 거래를 하던 범죄집단이 총격전을 일으킨 결과인데, 희대의 사이코패스 살인마(시거)가 얽혀있다. 보안관인 벨은 시거와 모스를 각각 추격하고, 시거는 돈을 가지고 달아난 모스를 추격해 죽이려 한다. 공간 배경이 미국 서부라, 영화에서는 내내 흙먼지가 부옇게 날리는 것을 볼 수 있다. 매카시 자체가 미국 서부를 배경으로 하여 보안관이나 그 주변인물이 주인공인 소설을 잘 쓰던 작가였다.
이 소설의 대단한 점은 스토리라인 너머에 있다. 이야기는 늙은 보안관인 벨의 시점과 3인칭 시점을 넘나들며 진행되는데, 단 한 사람, 시거의 시점과 심리만큼은 한 줄도 기술되어 있지 않다. 시거가 만나서 죽이겠다고 마음 먹는 사람들을 철저하게 죽이는 이야기만 펼쳐질 뿐이다. 독자들은 시거의 모습에서 절대적이고 불가해한 악과 혼돈을 본다. 우리에게 언제 어디서 돌연하게 벌어질지 모르는 무수한 삶의 위험요소들을 상상하게 한다. 늙고 지친 벨의 모습에서, 그러한 악과 혼돈 앞에 무력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나약한 모습을 본다.
이후 그가 발표한 <로드>도 <노나없>과 비슷한, 어쩌면 더 처절할지 모르는 절망과 공포의 세계를 그린다. 전지구적 멸망의 상황에 아버지와 아들 단 둘만이 살아남아 생을 견디는 이야기. 그러나 이 작가의 위대한 점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강이 말하는 희미한 징조를, 매카시 또한 결국에는 포착해내고 만다. 개인적으로는 <노나없>만큼 강렬한 인상을 가지지는 않았지만 <로드> 또한 충분히 훌륭하고 대단한 작품이다. 그래서 나는 그의 소설들을 사랑한다. 얼핏 챈들러처럼 마초적이고 보수적인 경향을 보이기도 하고, 그 부분을 좋아하지 않는 독자들도 있다지만, 이상하게 내게는 정이 많이 간다.
한 편의 잘 만들어진 이야기는 사람의 마음을 오래도록 울린다. 내가 20년 전 한강의 단편소설을 처음 읽고, 20년째 한결같이 그에게 빠져있듯이. 소설가 김영하는 최근에 발표한 장편소설 <작별인사>에서, 그의 특유의 이야기론(論)을 직접적으로 이야기한 바 있다. 인간의 생물학적 수명은 유한하므로, 태어난 인간은 언젠가 반드시 죽는다. 죽은 후의 그의 의식이 어디로 어떻게 갈지, 아직 죽어보지 못한 우리는 알지 못한다. 영원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이야기는 다르다. 그가 만들어낸 이야기는 어떤 방식으로든, 인간이 만들어낸 세계가 끝나지 않는 한, 다른 인간들 사이에서 오래도록 전해질 수 있다. 인간이 만들어낸 세계가 끝나지 않는 한, 인간들 사이에서 계속될 수 있다. 이야기가 가진 힘이다.
내가 잘 만들어진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도 그래서이다. 사람이 만든 이야기를 읽고 나의 이야기를 생각한다. 그 사람의 인생을 살펴보며 나의 인생을 살펴본다. 타산지석 같은 고루한 성어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다른 사람에 비추어 나를 돌아보는 것은 어쩐지 늘 하게 되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가 궁금하다. 어딘가에 사는 누군가들도 나와 비슷한 마음으로, 나의 이야기를 궁금해 할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나의 이야기를 쓴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는다. 앞으로도 계속, 내 힘이 닿는 한은 그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