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Dream into Action Jun 22. 2023

운명의 미국행

드림 인투 액션



2001년, 서른을 갓 넘긴 여인이 어린 두 아이들을 데리고 LA 공항 한 켠의 긴 줄에 서서 초조하게 주위를 둘러본다. 한국 시간으로는 새벽 2시라 두 살, 네 살박이 아이들은 잠이 와서 서 있는 것조차 쉽지 않다. 공항은 총으로 무장을 한 군인들로 분위기가 무척이나 살벌하고 크나 큰 공간은 무서움과 두려움으로 가득 찼다. 그도 그럴 것이 뉴욕 세계 무역 센터 쌍둥이 빌딩을 공중 파괴한 9.11 테러가 발생한 지 고작 이주일 밖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테러 재발 두려움의 확산으로 공포의 기운은 오히려 더 커진 듯하다. 교통사고로 남편과 아빠를 잃은 지 일 년도 채 되지 않아 세 식구의 마음이 아직도 상처투성이다. 제대로 내린 결정인지 아닌지 생각하기엔 이미 너무 늦었고 세 명 모두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 


공항 수속 중 미국 시민권자들은 신발을 신은 채 간단한 수색 후 통과가 되었지만 외국 여권을 가진 이국인들은 신발, 양말, 아이들 연필 뒤 지우개까지 들쑤셔 댄다. 미국으로 이민을 결정한 후 처음 들어가는 세 식구의 짐은 거대한 LA 브래들리 공항에서 무차별적으로 파헤쳐졌다. 절망과 무서움을 애써 감추며 여인은 피곤한 몸을 이끌고 아이들과 함께 댈러스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댈러스에서 비행기를 갈아타기 전 그 비슷한 수색을 다시 한번 통과한 후 긴 여정의 종착지 알칸소 주도인 리틀락에 도착한 것은 2001년 9월 25일 오후 시간이었다. 




아직 얼굴에는 앳된 모습이 여전한 이 젊은 여인은 그렇게 두려움과 희망을 한껏 품에 안고 "싱글맘"이라는 단어가 존재하는 이국 땅에서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멀고 먼 여정을 시작한 것이다. 용기였을까? 아니면 아이들이 겪어야 할 “홀어머니 자식”이라는 한국 사회 터부에 반항이라도 하는 것이었을까? 시차 때문에 밤낮이 바뀌어 “엄마, 미국 밤은 왜 이렇게 길어?”라며 눈을 말똥말똥 뜨고 계속 질문을 해 대는 아들, 내일이라는 단어가 어떻게 다가올지 두려운 맘을 고스란히 안고 밤을 지새운 여인은 그렇게 고국을 등지고 머나먼 땅 미국, 미국 속의 미국, 리틀락에서 이민 생활을 시작했다. 


대학을 졸업하긴 했지만 여느 한국인들과 마찬가지로 미국에 와서 영어로 소통하는 건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었다. 그녀가 처음 썼던 문장은 “Please help me” 가 아닌 “You can help me!”였다. 거의 협박에 가까운 부탁이었다. 건축학을 전공한 그녀는 설계 사무소에 간신히 취직을 했지만 일 년 후, 그렇게 얻은 직장도 잠깐, 회사의 경영 상황이 어려워지면서 한 달 노티스를 주고 퇴사하라는 통지를 받았다. 하염없는 눈물을 뒤로하고 그녀는 작은 가게가 딸린 주유소에서 저녁 식사 이후 파트타임 일을 시작한다. 




“상환아, 혜원아, 엄마가 저녁 먹고 주유소에서 일을 해야 하니 엄마 올 때까지 여기 이웃 할머니 말씀 잘 듣고 있어야 해.” 

“엄마는 왜 낮에도 밤에도 일을 해야 해?” 혜원이가 묻는다.

“그래야 엄마가 우리 먹보 상환이 오빠 굶기지 않지, 또 배고프다 하면 어떡해!” 엄마는 애써 너스레를 떤다.

저녁 설거지를 빠르게 마치고 옆집 할머니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수십 번도 더 하는 것 같다. 

주유소를 가기 위해 운전대를 잡으며 열심히 살면 해결되겠지라고 생각했던 게 오산이었어, 어떻게 세 식구가 먹고 살아갈까? 이젠 외국 땅에 와서 불법이 되어야 하나? 오만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멍하게 했다. 

새벽 두 시, 일을 마치고 살금살금 집으로 들어와 아이들이 자는 모습을 보고 짧은 시간이라도 눈을 붙이기 위해 서둘러 잠자리에 들었다. 베개 위에 봉투가 하나 놓여있었다. 하얀 봉투 안에는 5불짜리 지폐가 들어있었고 5살 배기 혜원이가 삐뚤삐뚤 글을 써 놓았다. “I hope this helps so you don’t have to work at night(이 돈이 도움이 되어 엄마가 밤에 일을 안 하면 좋겠어).” 

여인은 눈물이 왈칵 쏟아져 집 앞마당으로 나와 하늘을 보며 펑펑 울었다. 원망의 소리보다 우리 세 식구 살려 달라는 애원의 목소리가 칠흑 같은 밤하늘에 소리 없이 스며들었다. 수많은 별들이 그녀의 가슴으로 내려와 그녀를 꼭 감쌌다. 



이민 생활을 시작한 지 6년 후, 아이들에게 새아빠가 생겼지만 미국인 아빠와 정이 들기까지 서먹함이 꽤나 오래갔다. Rick은 아이들에게 따뜻한 아빠가 되기를 노력했으나 곧 식도암에 걸려 거의 병원 생활을 해야만 했고 가정 형편상 상환이와 혜원이는 워싱턴주에 있는 이모집으로 보내졌다. 18개월간의 투병을 뒤로하고 Rick은 우리 곁을 홀연히 떠나고 말았다. 우리는 Rick이 건축한 마지막 건물 홀에서 Rick이 육체의 고통에서 벗어남을 친구와 가족들과 함께 와인잔을 들어 축하하고 그의 자상함과 그와의 추억을 함께 나누며 심플하지만 따뜻한 장례식을 치렀다. 나이와 연륜이라는 명목으로 어른들은 떠난 사람을 보내는데 익숙했지만 사춘기를 지나던 고1 상환이의 가슴을 뚫은 상처는 너무나 깊었다. “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다 나를 떠나냐고!.”라며 상환이는 학교 락커와 벽을 치며 울고 또 울었다. 


이런 인생의 토네이도속에서 혜원이는 정말 있는 듯 없는 듯 엄마 옆을 지켜주었다. 잠이 들기 전 성경책을 읽고 고사리 같은 두 손을 모아 기도를 매일 하던 혜원이, 우는 어린 아기가 혜원이에게만 가면 울음을 그친다는 교회 집사님들의 말씀처럼 혜원이는 그렇게 어린 아기들을 어르고 사랑을 나누며 일로 바쁜 엄마를 멀리서 지켜보며 어린 시간을 보냈다. 너무나도 평범한 일상생활 속에서 부족함에 대한 불평 한마디 없이 그렇게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묵묵히 키워 나갔다. 




끝도 없을 것 같은 어려움과 세 식구를 뭉치게 해 준 작은 행복들을 겹겹이 쌓아가며 상환이, 혜원이는 엄마와 함께 21년간의 이민 생활을 통해 다채로운 색깔들의 인생 무지개를 만들어 나갔다. 2022년 8월 5일 단란한 세 식구가 오랜만에 보스턴에 모였다. 혜원이의 하버드 의대 입학식에 참가하기 위해서이다. 8월 3일이 엄마의 생일이니 딸애가 주는 거창한 생일 선물이라 해도 무난할 것 같다. 세계에서 뽑힌 164명의 하버드 의대 학생들이 단상에 올라 짧게 본인의 소감을 얘기하는 시간이 주어졌는데 혜원이는 단상에서 그저 하염없이 울었다. 엄마가 너무 가까이 있어서 갑자기 울컥했다고 엄마 핑계를 대는데 그 귀한 눈물이 누구 탓이면 어떠랴. 


나는 아쉽게도 혜원이가 하버드 의대를 가는데 엄마로서의 도리도, 큰 뒷받침이 되어주지 못해 자랑스럽게 내가 무엇을 했노라라고 얘기할 수없을을 솔직하게 고백한다. 상환이와 혜원이, 나는 아빠를 잃은 그날부터 한 팀이 되어 지난 23년간을 열심히 뛰며 어려움을 함께 이겨냈다. 우리의 팀워크 속에는 서로를 믿어주는 신뢰가 가장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거창하게 느껴지는 하버드 의대라는 화려함속에 너무나 평범한 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앞으로 생겨날 또다른 평범한 이야기가 여러분 자신의 이야기가 되기를 바라며 이 브런치라는 공간을 통해서 혜원이가 받은 미국 공립학교의 교육과정, 진정 공부만큼이나 인생에서 중요한 스포츠와 음악교육, 미국에서의 대학 생활 및 하버드 의대를 준비하고 입학하는 과정과 입학 후 일 년간 하버드를 다니면서 리더로서 성장해 가는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자 한다. 





#하버드의대  #미국교육 #리더 #영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