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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무딤이라는 무기

by 만숑의 직장생활

'나는 무디다... 나는 무디다... 나는 무디다...'


고객사 내 투자 팀을 대상으로 한 과제 발표를 위해, 회의실로 걸어가며 100번이고 되뇌었다. 발표 주제 자체가 투자 팀이 기존에 하던 일에 많은 변화를 가져오는 일이었기에, 그들의 반발은 불 보듯 뻔했다. 나의 마음은 마치 전쟁터에 나가는 병사의 마음처럼 무거웠다.


"형님, 힘내세요, 필요하면 제가 옆에서 서포트하겠습니다"


남 과장이 옆에서 힘을 북돋아 주려고 노력했지만, 이미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아, 그래 고마워.... 진행하다가 필요하면 얘기할게"


시작된 발표. 그리고 시작된 융단폭격. 다구리란 이런 걸까.


"아니, 그래서 지금 말씀하신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그럼 우리는 일이 두 세배는 늘어난단 말이에요!"

"아 네, 그 부분도 분명히 인지하고 있고요...(나는 무디다... 나는 무디다)"


"취지는 좋은데, 현황 파악이 너무 안 되어 있으신 거 같아요, 제가 지난번에 드렸던 자료 보신 거 맞죠?"

"아 네, 물론 검토 다 했고요, 그 부분에 대해선...(나는 무디다... 나는 무디다)"


"답답하네 답답해. 이런 식으로 할 거면 위에 보고해서 프로젝트 올 스탑 시킬 겁니다. 알았어요?"

"아 네, 혹시 어느 부분이 제일 문제라고 생각하시는지...(나는 무디다... 나는 무디다)"


그렇게 약 1시간가량의 회의가 마무리되고, 나는 겨우 정신을 추스르며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입이 바짝 말라, 물 한 모금을 들이켠다. 남 과장이 함께 자리로 돌아가는 길에, 나에게 위로의 말을 건넨다.


"와 형님, 어떻게 저런 무자비한 공격을 받고도 긴장도 안 하시고, 답변도 막힘없이 잘 하시실 수 있죠? 저라면 현기증 나서 쓰러졌을 거예요"

"뭘, 그냥 아무 생각 없이 하는 거지. 이런 일 한 두 번 겪냐"

"저는 아직 그 레벨까지는 안되나 봐요, 아까는 제가 다 긴장이 돼서 땀이 나던데요"


남 과장, 사실은 말이야. 나도 엄청 떨었어. 그런데 신기한 게 있잖아, 나도 모르게 계속 속으로 '나는 무디다'라고 되뇌었거든?


그런데 정말 무뎌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면서, 마음이 좀 나아지더라고. 말이 안 된다고? 나중에 너도 비슷한 상황에 닥치면 한번 해봐, 정말 무뎌져


그날 이후로 나는 가끔 힘든 상황이 닥쳤을 때, '나는 무디다'라는 자기 암시를 한다. 그리고 '무딤'이라는 무기를 장착하고 전쟁터로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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